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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리스리 앤서니 "스탠" 코벨레스키(영어: Stanley Anthony "Stan" Coveleski, 원래 이름은 스터니슬로스 코왈레브스키(영어: Stanislaus Kowalewski), 1889년 7월 13일 ~ 1984년 3월 20일)는 미국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1910년대와 1920년대에 메이저 리그 야구(MLB)에서 스핏볼 투수로 활약하였다. 14시즌 동안 아메리칸 리그(AL)의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워싱턴 세너터스, 뉴욕 양키스에서 뛰었다. 통산 450경기에 출전해 3,082이닝을 던지며 215승(196 선발승) 142패, 224 완투, 38 완봉, 2.8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969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선수 말년에는 워싱턴 세너터스에서 3년을, 뉴욕 양키스에서 1년을 뛰었고 1928년 시즌 후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 후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에서 살다가 1984년에 세상을 떠났다. 코 벌레 스키는 씹는담배 등을 이용해 스핏볼을 던지며 선발로 활약했던 투수였다. 그가 현역이던 1920년부터 이러한 투구가 금지되었으나, 예외적으로 17명의 투수에게 스핏볼을 던질 수 있도록 허용되었고 그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어린 시절-스타님을 라우스 앤서니 코발레브스키는 펜실베이니아주 샤모 킨 탄광촌에서 야구를 하는 다섯 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샤모 킨 지역에서는 석탄 채굴이 성업을 이루었고, 다른 또래들처럼 코 벌레 스키도 12살 때부터 탄광에서 브레이커 보이로 일했다. 임금은 한 시간에 5센트가량으로, 일주일 내내 72시간 동안 일하면 3.75 달러를 벌었다. 나중에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그는 "당시에는 열두 살짜리 폴란드 아이가 한 시간에 니켈 동전 하나를 벌기 위해 일주일 동안 72시간을 일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돈을 벌지 않고) 다른 데 가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라고 이야기했다. 당장 먹고사는 게 급했기 때문에 코 벌레 스키에게 야구는 그저 꿈에 불과했다. 하지만 날이 저물고 일이 끝나 조금 여유가 생길 때면 혼자서 야구 연습을 했다. 깡통을 50피트 정도 되는 거리에 놓고서 돌을 던져 맞추곤 했다. 18살이 되던 해에 그가 살던 지역의 한 세미 프로팀에서 코 벌레 스키에게 관심을 보이며 한번 와서 뛰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손에 깡통 대신 공을 쥐어본 그는 "야구공을 던지는 건 (돌을 던지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깡통을 맞추는 것에 비하면 홈플레이트는 훨씬 넓었다."고 나중에 당시의 느낌을 이야기했다. 그에게 샤모 킴에서의 야구 경력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마이너 리그
코 벌레 스키는 1909년 트라이스 데이트 리그 소속의 마이너 리그 팀 랭커스터 빨간색으로 지어서 와 첫 프로 계약을 맺었다. 계약을 앞두고 머뭇거렸던 코 벌레 스키는 형 존도 같이 계약하자는 조건으로 구단의 제안에 응했다. 그 무렵에 이름을 폴란드식의 '코발레브스키'에서 영어식인 '코 벌레 스키'로 바꾸었는데, 이후 선수 시절 내내 그 이름을 달고 뛰었다. [2] 나중에 그는 랭커스터로 처음 오던 날을 이야기하면서, "평생 기차를 처음 타본 날이었다. 너무 부끄러웠던 나머지 팀원들과 같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랭커스터에서 첫 시즌을 뛰면서 272이닝을 던져 23승 11패, 1.9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이후 랭커스터에서 2년을 더 뛰었고, 이곳에서의 세 시즌 동안 109경기에 출전해 53승 38패를 기록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코 벌레 스키를 메이저 리그로 올리면서 구원 투수로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선발로 내정되었던 투수 에드 클 레벨 퍼가 시즌 초 상처를 입자, 코 벌레 스키가 그를 대신해서 마운드에 섰고 곧 선발 자리를 꿰찼다. 시즌 개막 첫 주에 형 해리 코 벌레 스키와의 선발 맞대결이 예정되었지만, 해리가 이를 거부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그는 시즌 중반에 편도염에 걸리고, 한 경기에서는 39°C의 고열 상태에서도 등판을 강행하는 등, 여러 가지 건강상의 문제로 힘든 시즌을 보냈다. 이 해 45경기(선발 27경기)에 나서서 15승(13 선발승) 13패, 3.4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시즌 중에 건강 문제로 4.5 kg 정도 살이 빠졌지만, 오프 시즌에 살을 그 두 배로 불렸고 다음 시즌을 앞두고서는 이전보다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워싱턴 세너터스와 뉴욕 양키스
1924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 워싱턴 세너터스는 코 벌레 스키의 영입 등 전력 보강으로 1925년 시즌 아메리칸 리그의 우승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워싱턴에서 첫 시즌을 보내면서 코 벌레 스키는 작년 시즌의 부진에서 벗어나 다시금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클리블랜드에서 이미 전성기가 지났다고 여겨졌던 그가 활약을 이어가자 여러 평론가도 놀라워했다. 이번 시즌 그는 20승(모두 선발) 5패를 거뒀고 2.84의 평균자책점으로 AL 1위를 기록했다. 또한 그 해 MVP 투표에서 12위에 올랐다. [10] 세너터스는 이번 시즌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25년 월드 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맞붙었다. 한편 코 벌레 스키는 시즌 후반 등 근육 통증으로 고생했다. 그는 월드 시리즈에 2경기 등판했다. 2차전에 빅 알 드리는지와 선발 맞대결을 벌였는데, 양 팀은 7회까지 각자 한 점을 주고받았지만 8회 피츠버그에서 홈런이 터지면서 워싱턴은 최종 점수 2-3으로 패했다. 5차전에서 알 드리는지와 코 벌레 스키가 다시 맞붙었는데, 코 벌레 스키가 7이닝 4실점을 했고 파이리츠가 6-3으로 승리했다. 워싱턴 세너터스는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준우승에 머물렀다. 세너터스의 4패 중 2패를 떠안은 코 벌레 스키는 월드 시리즈에서 3탈삼진 5볼넷 평균자책점 3.77을 기록했다.
말년과 평가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코 벌레 스키는 1929년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에 가서 살았다. 주유소를 잠시 운영하기도 했지만 불어닥치면서 문을 닫았다. 자기 집 차고 뒤쪽 공터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무료로 야구 교습을 해주면서 마을 지역 사람들에게 유명해졌다. 현역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성 'Coveleskie'에서 끝의 'e'를 뺐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잘못 적어서 다시 고치는 일을 반복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1969년에 베테랑 위원회의 추천을 통해 1920년대 투수 웨이트 코이트와 함께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축하 연설을 하는 자리에서 코 벌레 스키는 "머잖아 이곳에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마다 내가 여기 서 있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했다."고 이야기했다. 말년에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역 양로원에 들어가서 살다가 1984년 3월 20일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반응형'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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