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0. 29.

    by. 멀티 존

    728x90
    300x250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며 경기도 도립공원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16대 왕 인조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곳에서 40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성문을 열고 청에게 항복한 곳으로 유명하다.

    개요

    과거 한양을 지키던 4대 요새 중 하나인 남한산성을 품은, 남한산성도립공원이 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총 12.4km(본성 8.9km, 외성 3.2km, 신남산성 0.2km), 높이는 7.3m이다. 원래 2천여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12km이다. 자연석을 써 큰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16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과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칸, 하궐 154칸, 좌전 26칸으로, 모두 252칸을 지었다.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이쯤되면 남한산성의 중요성과 성안이 유치 가능 인구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으로 시행(인조 17년, 1639)된 기동 훈련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12,700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성내에 남아 있는 건물은 불과 몇 안 된다. 동.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연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숭렬전 이서 장군사당, 보, 루, 돈대 등이 남아있다. 그 중 4대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쯤의 일부 성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사적 제 57호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2]

    현지 안내문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3]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3]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3]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3]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히며, 험한 지형을 활용,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내는 좋은 자료로 인정받아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3]

    역사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시대에 인조와 숙종 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7년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제158호),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하고, 201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4] 현재에 이른다. 오늘날 남한산성은 주변 시민들에게 훌륭한 휴식처이자, 건강을 위한 등산 산책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5]

    2016년 11월 9일 남한산성의 문화재 관리기관이 종전 (재)경기문화재단에서 경기도지사로 변경되었다.

    환경

     
    해동지도의 남한산성 부분

    남한산성의 전반적인 지형은 청량산(497m)과 남한산(480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서, 주봉인 청량산(482.6m)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남한산의 주봉인 벌봉(522m)과 망월봉(502m), 남쪽으로 한봉(414m)을 비롯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성이다. 남한산은 풍화에 강한 경기변성암 복합체로 이루어져있다. 산아래 해발 400m 내외의 고도에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비교적 넓은 면적의 평지가 펼쳐저있으며, 고위평탄면으로 알려져 있다. 이 평지는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룬다. 남한산 주변은 서고동저의 기복을 형성하며, 서쪽은 대체로 경사가 급하고 험하지만, 내부의 평지를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7] 산정을 중심으로 서쪽 저지에는 한강의 지류인 탄천, 동쪽에는 또다른 지류인 광안천이 북으로 흘러 본류와 합류한다. 결코 완만하지 않은 산 자체의 경사가 성벽과 결합하여 단단한 자연 방어선을 이루는 관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공략하기 어려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8]

    게다가 성안에는 45개의 연못과 80여 개에 달하는 샘이 있어서[주 1] 사시사철 이 마르지 않아 장기간 농성에 유리하다. 하지만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은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수문을 통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면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약 8 km 구간이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또한 산성 안에는 산성천이라 불리는 소하천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고을을 관통한 뒤 동문 옆 수문을 통해 빠져나간다. 한편 산성내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비록 남한산의 수목에 대한 벌목을 금지하는 법령이 만들어졌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전쟁과 민간의 난방연료 수요로 인해 남한산의 식생은 비교적 황폐하였다. 이에 따라 산사태가 빈번해지자 철종 연간에 산성마을의 유지가 사재를 출연해 1만 그루가 넘는 소나무를 식재했으며, 고종 때에도 성내 산사태 피해지와 인근 민둥산에 1만 5천주의 소나무를 식재했다.[10]

    한편 남한산성의 식생은 주로 활엽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림군락이 분포한다. 남한산성에는 신갈나무와 갈참나무,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밤나무, 잣나무, 아까시나무 등이 조림군락을 이루고 있다. 2007년에 실시된 남한산성 북사면의 산림식생에 관한 연구에서는 남한산성 북사면에 총 137종, 평균 약 22종의 식생이 분포한다고 보고했다.[11]

    남한산성은 한강변의 가시권에 속해서 강북의 아차산 일대와 더 북쪽의 불암산과 인왕산까지도 조망이 가능하다. 남한산의 서북쪽은 백제의 중심지였던 풍납동, 방이동과 그아래 몽촌토성 일대이며, 동북쪽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6세기 이후로 한산주와 광주의 읍치가 있었던 이성산성이 있는 하남시 춘궁동 일대이다. 이들 역사 유적들은 남한산성으로부터 직선거리로 5~6 km 거리로 징검다리식 위치에 놓인다.[9]

    연평균 기온은 인접 지역과는 고도 차이로 인해 약 4도 정도 낮은 기온이 나타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 ~ 1,400mm이다. 맑은 날의 평균 일수는 약 204일로  늦가을에 맑은 날이 많다. 산간 지역의 계절 변화는 평지보다 1~2주 늦게 봄이 오고 일찍 겨울이 온다.

    이용과 생활

    남한 산성 내부는 높이 400m 정도의 고위평탄면으로, 일시적 방어 요새로만 기능하는 다른 산성과는 달리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광주 군청이 설치될 정도로 행정의 중심지이자 지역 중심지로 기능해왔다. 또한 남한산성 내부의 취락은 고도가 높고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있다는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별되는 입지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남한산성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백제 시대의 토기 파편과 신라 시대의 거대한 건물 터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일시적 농성전용 요새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본격적으로 사람이 남한산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에 남한산성을 수축하며 산성 내로 촌락을 이전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10]

    산성 수축 이전, 고대의 성을 중심으로 한 지방 통치 단계에서 광주의 관촌 일대는 자연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였다. 정치군사적인 역량이 강화되면서 영역이 확대되자 성촌의 수는 크게 증가했다. 지방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신라는 주군제를 실시함으로써 지방지배의 틀을 완성했다. 고구려의 한산군에 해당하는 광주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함께 한산주로 불리다가 경덕왕이 이름을 한주로 개칭하였다. 한주에는 일찍부터 군주가 파견되어 통치하였다. 이후 고려 시대에 와서 성종 즉위년에는 외관의 파견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듬해 12목을 설치한다. 목은 기존의 주를 대체하면서 한주 또한 광주목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조선 시대에 와서 남한산성의 축성이 완료되면서 1627년 조선 정부는 광주목의 읍치를 산성 안쪽의 성내동으로 이전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전의 읍치는 동부면 춘장리로 재편되었으며, 항간에서는 '고골'(古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12] 일반적으로 산성의 존재의의가 방어에 있었던 것에 비해, 치소를 유치하게 된 성내동은 행정기능을 추가하여 관아도회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13] 성내동은 유사시 임시수도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설립되었으며, 이와함께 광주목은 광주부로 개칭되었다. 방어취락으로 시작해 새롭게 광주부의 행정중심지가 된 성내동은 남한산성 내부의 "성내"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동문 밖의 일부 구역인 "외문"을 포함하였다.

    이렇게 산성안에 대규모 행정 중심지가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식수를 구하기 쉽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비록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개발했지만, 산성 내에는 적지 않은 수의 우물이 있었을 만큼 수원이 풍부하였다. 하지만 초기에는 선뜻 남한산성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이 없어서 모집해게 되었으며, 초기 이주자중 일부는 죄를 지어 변경으로 송치할 대상도 포함되었다. 이 결과 300여 호에 달하는 민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후로 모집은 계속되어 숙종 대에는 600여 호가 성내동에 거주하게 되었다.[14]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성내동은 대체로 1천 가구, 4천 여 명의 인구를 보유한 취락이었다. 이 인구는 남한산성 안팍의 인구를 모두 고려한 수치이며, 산성 안쪽에만 국한시키면 600여 호 남짓한 규모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1907년의 조사에 따르면 성내의 호구는 446호, 1840명이었다. 이후 구한말 의병운동이 남한산성에서 일어나면서 일시적 피해를 입고, 1917년 말 군청이 평지로 이전하면서 산성 취락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1930년대 중반의 보고에는 성분 안쪽의 산성리에 241가구, 1,402명의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40년대 중반 무렵 산성리는 약 70여호의 벽촌으로 변하게 되었다.[15]

    경제적 이용[편집]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부에는 조선초기 까지만 하더라도 124결이라는 좁지 않은 면적의 경지가 확보되어 있었다. 당시 광주목의 토지가 16,269결의 규모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약 0.76%의 경지가 산성내에 개발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내동의 인구비율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낮은 수치로서 산성내의 토지부양력이 그다지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11년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사된 산성리의 경지는 논 3,823평과 밭 140,368평 규모였으며, 이는 광주군 경지면적의 약 1.2%를 차지한다. 따라서 산성리는 광주군의 행정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력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15]

    한편 1911년의 조사된 결과를 보면 당시 219,832평의 토지 가운데 82.9%에 해당하는 182,288평은 민유지, 나머지 37,544평은 국유지로 분류되었다. 필지당 국유지의 면적이 사유지의 면적을 크게 상회하였는데, 이것은 행궁, 각종 관서, 시장, 창고 부지등의 시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중 전체의 63.9%인 140,368평이 밭으로 이용되었으며, 지형과 수리상의 이유로 논은 토지전체의 1.7%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산성내의 농업은 밭농사 위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6]

    한편 산성동은 매월 초이틀을 시작으로 5일마다 성내장이 열려 교역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것은 광주부가 경기남부를 지나 도성으로 진입하려 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을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산성 내에서 큰 규모의 장이 열렸다는 것은 남한산성이 행궁과 종묘, 사직 등과 같이 임시 수도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한다.[17]

    군사적 이용[편집]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중앙군이 5군영 체제로 정비되면서 수어청이 남한산성을 담당하며 수도외곽의 수비를 전담했다. 남한산성의 방어는 수어청에 소속된 5개의 영이 일정 구간을 전담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산성의 수비에는 승군 또한 참여하였다. 승군은 남한산성 내에 있던 9개의 사찰에서 주재했다. 사찰에는 무기와 탄약을 보관하는 병기고와 화약고가 설치되었으며, 배속된 승려가 관리를 맡았다.[18] 산성의 수축이 완료된 이후 산성에 주둔하는 수어청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재원의 확보가 중요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하삼도에서 올라오는 조세의 일부를 비축하고 둔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다. 한강수로를 타고 올라온 조세미는 창모루와 둔지나루터에 하역된 후 마차나 등짐으로 사창리를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되어 비축했다. 또한 산성내의 토지의 전세와 대동미는 서울로 올려 보내지 않고 산성 안에 비축하였다.[18]

    정조 때 수어청의 병졸은 2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 화기 또한 중앙의 여러 군부 가운데 가장 많았다. 군량미 또한 5만에서 8만 석에 이르렀다.

    한편 남한산성의 운영에는 승군의 역할 또한 지대하였다. 승군은 6도의 사찰에서 차출되어 매년 2개월씩 수성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이들은 성안의 9개 사찰에 머물며 비상시에 전투에 나아가 적을 토벌하는 한편, 군량미의 수송, 성곽 축조와 보수, 둔전의 개간, 무기의 제작, 시신의 수습과 같은 여러 가지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승려들은 또한 본연의 종교적인 의식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서책의 인쇄와 같은 기타 잡역에 동원되었다.

    역사

    삼국 시대 및 통일 신라 시대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남한산성이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세운 왕도인 하남위례성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산성이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晝長城, 일장성(日長城))이라는 의견이다.

    하남위례성을 남한산성과 연관 짓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고려 시대이다.[21] 이러한 견해는 《조선왕조실록》,[22]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대부분의 조선 시대 지리 관련 문헌에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이라는 주장이 실릴 정도로 힘을 얻었다.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 조선의 입장에서 한성이 국가의 수도로 적합한 곳임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정남한지》의 저자인 홍경모만이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인용하며 이런 주장을 반박하였으나[23] 인정받지 못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최초의 백제 수도인 위례성으로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을 강력하게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2001년과 2002년에 걸쳐 토지박물관에서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조사 하였는데, 이곳에서 백제의 유적으로 보이는 수혈과 화덕자리 그리고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어 백제 시대에도 남한산성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아직 대대적인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도읍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며, 계속 연구 중이다.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대해서 두 번째 설은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12년 조에 “한강 이남의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과 투쟁에 들어간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 당나라의 병력 4만여명이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를 침범하려는 의도를 보이던 시기였고 고구려의 패잔병과도 대치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를 대비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축조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통일 신라 시대의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것은 이후 여러 고문헌에도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연구에서 주장성과 남한산성의 크기를 비교하여 볼 때 당시 한산 지역 산성 중에서 이 기록에 근접한 산성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다는 것이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24] 또 조선 시대 기록에도 주장성의 길이가 3,993보[25] 나 17,400척[26]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거리를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여 계산하면 주장성에 관한 기록과 비슷하다. 인조 당시 개축할 때 기록에는 “옛 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하였다.”라는 《남한지》의 기록이[27]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에서 통일신라 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토지박물관의 남한산성 행궁터 조사에 따르면, 조선 시대 층위 아래에서 길이 50m가량의 통일 신라 시대 초대형 건물지가 출토되었고, 유물로는 국내 최대 크기의 통일 신라 시대 평기와가 다수 출토 되었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는 특별한 기록은 없다. 다만, 광주부사 이세화(李世華, 미상~1238년 9월 25일(음력 8월 16일))의 묘지명에 따르면 몽골의 고려 침입 당시 1231년 1232년 두 번 광주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는데,[29] 광주 지역에 소재하는 산성은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이지만, 6세기 중엽 축성된 이성산성은 규모가 작아 농성 전용이라기보다 해미읍성처럼 행정 중심지의 성격이 강해 위의 기록에 나오는 광주성을 남한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서 언급된 이세화의 묘지명에는 몽고군이 침공했을 때 성을 수리했다고 되어 있으며,[29] 고려사》에 공민왕 10년 홍건적이 침공했을 때 공민왕이 개경을 포기하고 피난길에 오르자 광주 주변 백성들이 모두 산성으로 올라갔다는 기록[30]이 고려 시대 기록의 전부다. 다만, 남한산성이 고려 시대 기록에 나오는 광주성이라는 전제 하에 기록 자료나 발굴된 고려 시대 유물이 적은 점을 들어 일각에서는 고려 시대의 남한산성을 전쟁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군사적 용도의 농성 전용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시대

    조선 초

    전략 거점으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조선 태종 때 본격화되었다. 1401년 요동을 다녀온 이자영의 보고에 의거, [31] 명나라가 조선을 침략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자 태종은 국경과 내륙을 막론하고 고을 별로 산성을 쌓고 기존의 산성을 개축하여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남한산성도 이러한 국방정책에 따라 세종 때에 군사시설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직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남한산성이 개축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남한산성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현황을 파악한 기록이 있는데,[25] 이 기록은 남한산성을 이용하기 위해 현황을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를 통해 당시 개축이나 수리는 안했어도 군사기지로 이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6년 서애 류성룡이 남한산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고[32], 1603년(선조 36년)에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33], 실제 남한산성이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1621년(광해군 13년)에 석성으로 개축 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때 일부 수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광해군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폐위되었으며, 남한산성이 본격적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증축된 것은 인조 대에 이르러서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집권세력이 교체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에 큰 변화가 초래되었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친명배금 정책을 취한 것이다. 후금이 침입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더욱이 인조 2년(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계기로 도성을 방어하고 유사시 왕이 피신할 수 있는 거처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크게 증대되었다.[34] 이에 인조는 1624년부터 1626년까지 2년간 공사를 추진하여, 공사 완료 후 광주목이 남한산성으로 이전했고, 수어청도 같은 해에 남한산성에 설치되었다. 성의 둘레도 6,927보가 되었다. 왕이 거처할 행궁도 인조 4년 성곽이 완성될 때 건축되어 《남한지》, 《광주부읍지》에 의하면 상궐이 72칸 반,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이 건축되었다.

    병자호란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을 피할 수 없었다. 1627년(인조 5년)에 발발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조선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한데 대해서 조선이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후금은 조선의 왕자를 보내고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따라 청 태종 황태극이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침공 직전 청으로 국호를 개칭한 황태극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후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이에 조선은 먼저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의 왕자를 먼저 강화도로 피신하게 하고, 조정 또한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청군의 선발대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으면서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35] 당시 성 안에는 1만 3천여명의 군사가 방어를 하고 있었고, 양곡 1만 4300여 석과 소금 90여 석이 있어 겨우 50일 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청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남한산성에 당도해 산성 밑의 탄천 부근에 포진하였다. 이에 전국의 구원병들이 출병하였지만, 모두 남한산성에 당도하기 전에 궤멸되었다. 구원병이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자 성안의 조정에서는 강화론이 제기 되었다. 주화파와 주전파 사이에 여러차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이듬해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당하고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자와 군신들의 처자 200여 명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대세는 강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36] 그 이후 청군은 화포를 쏘아대어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등 압박을 가하였다. 1월 26일 조선의 사신이 협상을 위해 청 진영에 도착했을 때 청군은 강화에서 포로가 된 왕자를 대면시켰다. 이에 조선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1월 30일 인조가 45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갖게 되었다.[37] 이 곳에서 인조는 소복을 입고 청나라 황제 황태극은 높은 단상에 앉아서 삼궤구고두의 예를 받았다. 삼궤구고두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여진족의 의식이었다.

    호란 이후

     
    동국여도(19세기 초)의 남한산성도(경기도박물관 소장)

    호란 이후로 남한산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홍이포와 같은 공성무기의 위력을 실감하였고, 이후 조선은 조총 화포를 주로 하고 궁사와 창검을 보조무기로 하는 형태로 체제를 바꾸게 되었다. 이에 따라 봉암외성, 포루, 돈대, 옹성 등을 증축하였고, 문루와 장대(將臺)를 축조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전쟁으로 인하여 무너진 성벽의 보수 및 원성에 대한 증개축과 함께 아마도 남옹성 3개가 신축되고 연주봉옹성을 비롯한 4개의 옹성에 포루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8]

    1686년 숙종 12년에는 광주유수 윤지선이 봉암성 축조를 건의하였다. 또한 숙종 19년에는 수어사 오시복이 한봉외성을 새로 건축하였다. 숙종 31년에는 수어사 민진후의 주장에 따라 봉암성에 2개의 포루를 건설하였다.[38] 포루의 방향은 정확히 한봉의 정상부를 향하도록 설치되었으며, 장경사의 원성부분에도 포루를 신축해서 방어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숙종 45년에는 남격대를 신축했다. 이후 많은 수축작업이 이루어져서, 영조대에는 3번의 큰 수축 공사가 이루어졌고, 정조 3년에는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작업이 벌어져 기와로 쌓았던 여장을 벽돌로 교체하였다.[39]

    조선 말, 남한산성은 의병 활동사에 다시 등장했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후 봉기한 의병들 중 경기 의병이 이천 의병들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2월 28일). 이후 한성 진공을 준비했으나, 관군에 체포된 김귀성이란 자가 관군에 남한산성 성벽 서쪽에 파손된 부분이 있음을 밀고했다. 관군은 이 파손된 부분으로 밀고 들어와 의병을 해산시키고 성을 장악했다.

    1907년 군대 해산 후, 일본은 당시 조선군의 무기와 탄약을 인수했는데, 남한산성 내 사찰에 보관 중이던 무기와 탄약도 회수하여 폭발시켰다.

    반응형

    '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욕시티 지리와 역사  (0) 2022.11.15
    런던탑  (1) 2022.10.29
    목포시 지리와 기후  (0) 2022.10.28
    목포시  (1) 2022.10.28
    금강산  (0) 2022.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