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0. 28.

    by. 멀티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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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서울 전투(문화어: 서울 해방)는 한국 전쟁 극초기에 일어났던 전투 중 하나이다. 국경에서의 전투에 이어 1950년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구 서울시를 중심으로 하여 중부 지역 전 범위에서 일어난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조선인민군 사이의 교전이다. 교전 결과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국군은 한강 이남 지역으로 밀려났다.

    배경
    이 부분의 본문은 폭풍 작전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인민군이 T-34를 앞에 두고 곡사포로 엄호하는 전격전의 방식으로 38선 전선을 월경하면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은 폭풍 작전 구상 때 서울이 함락되면 사실상 승패가 결정지어 끝나게 될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었다. [1] 이런 전제하에 조선인민군은 부대를 2개 군단으로 나눠 1군단을 주공으로 서울 방면으로 전면전을 펼치고, 2군단을 조공으로 하여 1군단의 공격을 엄호하기로 하였다. 대한민국은 대규모 공세를 생각하지 못하고 일부 부대가 독자적인 판단으로만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은 거의 완전한 기습공격을 이뤄냈다.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육군과 비교하여 병력, 장비, 훈련도 모두를 압도하였다. 특히 국군이 유효한 대전차 무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차의 우세는 한국군 내에 공포감까지 불러 들어왔으며 밀러 내려갔다. 하지만 한국군은 사기가 높았고[1육박 공격으로 인민군 전차를 파괴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전방 방어부대 중 상당수는 하천 장애물과 여러 지형을 이용해 교묘한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장애물이 전혀 없는 의정부시 방면을 제외하고는 한국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정부 방면에서 기갑부대의 충격력을 이용한 인민군의 공세로 의정부시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경과

    1950년 6월 25~28일 사이 전황 지도.
    문산-봉일천 방면
    개성·문산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문산 부근을 수비하고 있던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은 25일 개성-문산 전투에서 제12연대가 후퇴해 임진강 지역 철교를 잃었으나 임진강 인근 진지들을 사수하고 있어 인민군은 임진강을 도하하지 못하고 있었다. [3]

    6월 26일
    전날인 25일 오후부터 증원부대가 도착하기 시작해 차례대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보병학교 교도대는 제11연대에, 육군사관학교 교도대는 제13연대에 배속되어 주는 방어선을 강화하였고, 제15연대(연대본부 및 제3대대)는 제20연대 제3대대에 배속되어 최후방어선인 위전리(현 파주시 월롱면)-봉일천 선(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에 배치되었다. [4] 제1사단장인 백선엽 대령은 사당 방어선 중심을 1호선 접근로에 두면서 주 방어선이 뚫리는 때에 대비해 위 전리성에서 주 방어선 부대의 후퇴를 엄호하고 역습하는 방안을 두었다.

    26일에는 사단 동쪽 방면의 파주 파평산 정면에 인민군의 전차부대가 출현하였다. 연대는 우선 2.36인치 M9 바주카로 공격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묶은 급조폭약으로 공격하는 육박공격전을 펼쳤다. 육박 공격에 전차부대가 후퇴하였으며 이어 내습한 인민군 보병부대도 근접전으로 격퇴되었다.

    한편 1사단 서쪽에서 공격하던 인민군 제6사단은 26일 새벽 전차 5대를 선두로 임진강철교를 건너 공격하기 시작했다. 국군 제11연대는 저항하였으나 오전 9시경 문산역 북쪽의 고지가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이 고지는 경기 가도를 잇는 중요한 지역으로 국군 제11연대와 제13연대는 퇴로가 끊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을 점령한 인민군은 진격을 멈춘 채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제1사단장은 즉각 역습을 명령하여 육군사관학교 교도대는 오전 10시경 고지대를 탈환하였다. 이때 확보한 인민군 포로의 정보를 통해 백선엽 대령은 인민군이 반쯤 건넌 상태라고 판단, 13시경부터 11연대 및 연대에 배속된 보병학교 교도대 등 총 3개 대대를 동원하여 반격 작전을 시작하였다. 반격 작전은 순조롭게 이뤄져 제1사단은 주 방어선 탈환에 성공하였다. [5]

    하지만 이 무렵 의정부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고, 의정부를 지키던 제7보병사단이 후퇴하면서 제1사단의 우익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인민군 제1사단은 가여울(현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적성 방면으로 진출해 전차를 앞세우고 국군 제13연대를 재차 공격하였다. 제13연대는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인민군 제1사단 주공이 제320호선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문산을 위협하였다. [6] 또한 국군 제11연대 후방에도 인민군 전차부대가 나타나 정면에서 공격이 활발해졌다. [5] 결국 백선엽 대령은 주 방어선 유지를 포기하고 26일 19시경 최종저항선인 위전 방어선(봉일천에선)으로 후퇴를 명령했다. 위전리 인근에 배치된 제15연대의 엄호하에 주 방어선의 부대는 성공적으로 후퇴하여 위전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6]

    6월 27일
    이 부분의 본문은 봉일천 전투입니다.
    위전 방어선에는 제15연대(제20연대 제3대대)가 1호선 도로의 위전리에, 제13연대는 307호선 도로에 있는 도내리(현 파주시 월롱면)에, 제11연대는 예비부대로 최후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또한 국경 전투 이후 불가피하게 흩어져서 철수한 제12연대는 금천(구 시흥시 지역)에서 재편성하고 있었다. [7]

    27일 10시경부터 전차를 주력으로 한 인민군 제6사단 주력 부대가 한국군 제15연대 정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5연대는 57 mm 무반동포와 2.36인치 바주카포로 대전차 방어선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 대전차 무기는 T-34 전차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결국 제15연대 제3대대장은 스스로 특공대를 이끌고 육박 공격을 하여 전차 6대를 격파하였다. 인민군은 공격을 포기하고 후퇴하였으며, 국군 제15연대는 전차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였다. [7]

    위전 방어선 교전 도중 제1사단 우익의 제13연대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19시경부터 인민군 제1사단의 제병협동공격으로 방어선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2.36인치 바주카포로 인민군 전차 2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하자 인민군의 공격은 약화하였으며 연대는 방어선을 탈환하였다. [7]

    6월 28일
    전날인 27일 밤, 비가 내리는 틈을 타 인민군의 야간 공격으로 제1사단의 최후방어선이 붕괴하였으며 연대 병력은 야간에 봉일천에서 철수하였다. 같은 시기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육군본부에서 파견된 김홍일 소장이 이끄는 작전지도반에 미아리 방면 방어선의 상황 악화에 대해 듣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여 한강 도하 철수를 준비하라고 권고하였다. 하지만 최종 명령을 바꿀 수는 없어 제1사단은 일단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받았다.

    28일 8시경, 제1사단은 기존의 명령에 따라 반격 작전을 시작하였다. 제11연대는 최후 방어선을 거의 탈환하였으나 우익의 제13연대의 공격은 인민군의 공격과 서로 부딪쳐 진전이 없었다. [5] 백선엽 대령은 서울특별연대와 제20연대 제3대대를 투입해 방어선을 연결하였다. 이날 인민군의 저항은 강하지 않았으며, 제1사단은 주 방어선의 탈환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8]

    하지만 같은 날 28일 1시경 이미 미아리 고개에 있던 국군의 최후 방어선이 인민군 전차에 돌파당했으며, 28일 오후 제1사단은 후방이 차단되었고 육군본부와의 연락도 끊겼다. 탄약 잔량도 부족해 백선엽 대령은 더 이상의 현 위치 고수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후퇴를 결심하였다. 이어 김포반도 전투와 오류동 전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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