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0. 29.

    by. 멀티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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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라틴어: Roma antiqua, 이탈리아어: Civiltà romana, 영어: Ancient Rome)는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으로 고대 그리스, 오리엔트, 셈족, 서유럽 켈트, 게르만 등 문화의 용광로였다.[1] 고대 로마의 문화, 법, 군사 체제는 서구 유럽, 동구권을 막론하고 현대 사회 , 정치, 전쟁, 예술, 문학, 건축, 기술, 언어 분야의 기틀이 됐다.

    고대 로마는 수백 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며 왕정에서 과두 공화정으로, 또 점차 제정으로 변모했다. 기원전 7세기경 로마는 지역 중심지로 번영하던 도시 국가로 왕정 체제였다. 기원전 509년에는 왕정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 계급이 공화정을 세웠다. 로마인들은 평민과 귀족 간에 200여 년 이상 투쟁과 타협을 반복하며 로마 특유의 과두정 체제를 점진적으로 이루었다. 내부의 신분 투쟁 가운데도 로마는 외적들을 복속시키며 마침내 기원전 272년경 게누아(제노바)에서 이탈리아 최남단까지 거대한 동맹 체제를 수립했다. 로마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150여 년간 여러 정복 전쟁을 통해 갈리아, 카르타고 등을 정복하고 지중해 전역을 제패했다.

    로마 제정은 기원전 1세기 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씨를 뿌리고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정 초기의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라틴어 문학 등 그레코-로만 문화의 전성기를 이뤘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년~117년)에 로마 제국은 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남으로는 아프리카 수단까지, 서로는 포르투갈의 대서양 연안에서 동으로는 카프카스 지방까지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 오늘날 면적으로 환산하면 현재 미국 면적의 2/3에 달하고 인구도 현 미국의 절반에 약간 안되는 정도로 추산된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 공인 후 교황 선출 문제를 기화로 서로마, 동로마로 분할됐으며 이민족의 침략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서기 5세기 경 서로마 제국은 멸망 후 게르만족의 여러 독립 국가로 갈라져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등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여타 서유럽의 정치 세력들이 나타난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한다.

    역사적 배경

     
    로마 통치 하의 지역

    기원전 약 10세기를 전후로 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정착하여 살던 여러 부족은 약 2-300년에 걸쳐 서로 교류하거나 전쟁을 벌였으며 융화와 추방을 반복했다. 고대 로마 문명의 초기 역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기원전 8세기 경 라티움에는 라티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이 땅은 티베리스 강 이남 중부 이탈리아 서해안에 자리잡아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평야였다.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 인도-유럽어족이 이탈리아 반도 곳곳에 흩어질 때 형성된 일개 이탈리아어파 집단이었다. 이들은 분명 농경과 목축으로 먹고 살았을 것이며, 손으로 짠 투박한 옷을 입었고, 손으로 조야한 도자기를 만들어 썼는데, 이들의 집은 화로와 대문 밖에 없는 원형 나무 오두막이었다. 몇몇 보석 장신구와 청동 혹은 철 연장을 제외하면 이들은 해외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쓴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들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라는 이름의 도시가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기원 전설은 거의 대부분 비역사적인 허구이므로, 지리적 혹은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검증이 필요하다. 기원전 750년경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들어섰는데, 이들 산지 촌락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언과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대다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는데, 이 곳에 복합 문명이 발달하게끔 깊은 영향을 준 두 집단이 있다. 하나는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 에트루리아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들이었고, 다른 한 집단은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를 통일하게 될 도시 로마의 발전에 있어 각별히 중요한 민족이었다.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로마 왕정입니다.
     
    전설에서는 암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의 시조라고 전한다.

    왕정 시대는 공화정 이전 시대로 기원전 753년부터 508년까지이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6] 로물루스가 세운 것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이 날짜는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의 역사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설정한 것으로, 그는 구체적인 과학적 증거 없이 고대 로마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을 연구하여 이 날짜를 도출했다. 현대 학자들은 로마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5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증하고 있다.

    기원전 7세기 말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이 지역에 귀족·왕족 계급을 이루어 피지배층을 정치적으로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 말경에 이곳의 지배권을 잃은 것이 확실하며, 이 시점에 라티움과 사비니 부족이 권력 집중을 억제하는 공화정 체제를 세웠다.

    공화정 시대

     이 부분의 본문은 로마 공화정입니다.

    에트루리아 캄파니아에서 패배하고, 라티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게다가 산지 종족들이 라티움(latium)을 침공하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군사적 패배로 로마에 사회·정치적 위기가 일어나면서 왕정이 몰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연대 목록(fasti)에 기록된 기원전 509~507년을 왕정 몰락의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초기에는 군사 위원회 (military tribune)에 의한 공동통치의 형태였다가 독재관을 자주 선출하는 문제가 생기자 2명의 집정관 제도로 바꾸었다. 로마의 정체는 견제와 균형, 권력 분점으로 구성된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두 집정관으로 군사 통솔권인 명령권(imperium)을 통해 집행 권력을 함께 행사했다. 집정관직은 오랜 기간의 실험과 발전을 거친뒤에야 비로소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5세기 중엽쯤에는 공화정의 고위 정무관직을 집정관이라 하였다.집정관은 원래 귀족들의 자문 회의였던 원로원과 협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원로원은 양적으로 확대되었다.공화정의 다른 정무관으로는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이 있었다. 정무관직은 원래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공화정의 민회로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두며, 전쟁과 화의 여부를 결정하고 요직 관리를 선출하는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 하위직 주요 관리를 선출하는 트리부스회(comitia tributa)가 있었다.

    로마는 점차 에트루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되었다.그중 베이 점령은 라티움 밖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징표가 되었으며 그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 내에서 팽창을 거듭한다. 이후 삼니움 족의 캄파니아 침입에 개입하여 3차 삼니움 전쟁을 치루었고 여기서 승리한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패자가 된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앞두고 로마의 지배권에 마지막 도전장을 던진 세력은 그리스 식민시 타렌툼이었다. 기원전 281년 타렌툼은 에페이로스의 피로스를 끌어들여 로마와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다.[로마는 정복을 통해 전략 요충지에 로마의 식민지 건설하여 이탈리아에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로마는 3차에 걸쳐 포에니 전쟁(BC 264 - BC 146)에서 카르타고와 격돌했다. 1,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초반에 카르타고가 우세했으나 결국은 로마가 승리하면서 로마는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 에스파냐 등지를 정복한다. 후에 3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카르타고가 로마와 맺은 협약을 위반하여 로마의 침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여 폐허가 되고 만다. 이로서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었다.[20][21] 기원전 2세기에는 마케도니아 왕국 셀레우코스 왕국을 물리치면서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다.[22][23]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의 군사 제도에 극적인 개혁을 시행하였다.

    해외 팽창은 내분을 불렀다. 원로원 의원은 로마 속주의 부를 통해 부유해졌지만 주로 소농 출신의 병사들은 고향을 오래 떠나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했으며, 임금 노동 대신 외국 노예에 크게 의존하게 되어 대농장이 발달했다.[24][25] 전리품 수입 덕분에 새로 확보한 속주에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세금 징수 할당 제도로 신흥 상인 계급인 기사 계급은 경제적 이익을 거머쥘 기회를 얻었다.[26]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으로 원로원 의원의 상업 행위가 금지되면서 이론상 원로원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사 계급은 정치 권력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27][28] 원로원은 끊임없이 정쟁을 일삼아 계속 토지 개혁에 발목을 잡았고, 기사 계급에 정치 발언권 확대를 거부했다. 원로원의 정적들끼리 도시 실업자 출신의 폭력조직을 조종하여 완력으로 유권자를 위협했다. 이런 상황은 기원전 2세기 말 평민에게 주로 귀족이 소유한 토지를 재분배하려는 토지 개혁 입법을 시도한 그라쿠스 형제 시대에 극에 달했다. 두 형제는 살해당했는데, 여기에 원로원은 불만을 품은 평민과 기사 계급을 달래고자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한 개혁의 일부 입법을 통과시켰다. 또 이탈리아 동맹국에 로마 시민권 확대를 거부하면서 기원전 91~88년에 동맹국 전쟁이 일어났다.[29]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병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잃고 점차 사병화(私兵化)되었으며, 유력한 장군이 국가와 원로원을 장악하게 된다.[30] 이로써 마리우스와 그의 부하 술라는 내전을 벌였으며, 술라가 기원전 82년 콜리네 문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결국 기원전 81년~79년에 술라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31] 술라는 무너져가던 공화정을 부흥시키려 개혁을 하고 독재관에 취임한 지 2년 만에 자진 퇴임한다. 그러나 술라가 죽으면서 로마는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는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술라의 부하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세 사람이 제1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공화국을 농단했다. 이후 기원전 53년에 파르티아와 벌인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카이사르와 원로원파로 돌아선 폼페이우스로 나뉘어 전개된다. 기원전 58년부터 7년에 걸쳐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갈리아 전쟁) 원로원과 대립하던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에 루비콘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파 군대와 내전을 일으킨다(카이사르의 내전).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고, 탑수스 전투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 되어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32]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독재 의혹을 받다가 공화제 헌정을 복원하려는 정적(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에 암살당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정권을 잡지 못하였고,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수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제2차 삼두정치를 이루며 권력을 잡는다.[33][34] 그러나 이 정치적 동맹은 권력 투쟁으로 기운다. 레피두스는 추방되며,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며,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 지배자가 되었다.

    제정 시대

     이 부분의 본문은 로마 제국입니다.

    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잡았지만, 공화정을 가장했다. 이때의 통치체제를 원수정이라 하며(사실상 제정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프린켑스(제1의 시민)라 칭한다(이렇게 아우구스투스가 독재관을 거부하는 등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은 양아버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때문이기도 하다).[36]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는 심각한 반대 없이 권좌에 올라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본격적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루었고, 이 왕조는 티베리우스 사후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의 치세를 거쳐 기원후 68년 네로가 자살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후 1년간 로마는 내전상태에 돌입하면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즉위한다. 후에 시리아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자기 군단의 지지를 받아 로마에 입성하여 비텔리우스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대를 개창한다.[37] 제정 시대에도 영토 확장은 이어졌으며 안정을 유지했지만,[38] 흔히 저열하고 타락했다고 평가받는 황제도 몇몇 있었다(가령 혹자는 칼리굴라를 정신이상자로 보기도 하며(즉위 후 얼마지나지 않아 정신병이 걸려 폭정을 일삼았다). 네로는 국가 정사보다 개인 관심사에 더 몰두하며 잔인했다는 평판을 받는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네로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39])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뒤를 잇는다.(AD 69 - AD 96)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40]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이후에 로마 번영의 시작을 알린 오현제 시대(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콤모두스)에 제국은 영토나 경제ㆍ문화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41]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대략 80년간 지속되면서 이시기에 로마는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이루었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시대에 제국은 번영했다.[42][43] 트라야누스 재위시에는 다키아(오늘날의 루마니아)의 정복과,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통하여 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되며, 그 지배 지역이 650만km2에 이르렀다.[44] 트라야누스 사후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제국을 순찰하면서 국경 수비를 강화하는데 힘쓴다.

     
    기원후 117년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 제국 최대 판도.

    193년에서 235년 사이는 세베루스 황조의 치제(흔히 말하는 군인황제시대)로 헬리오가발루스같은 무능한 지배자도 나타났다.[45] 게다가 군대가 제위 계승에 영향력을 더욱 행사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3세기의 위기’라는 혼란기(49년간 20여명의 황제가 교체됨)로 접어들었다.[46][47] 이 위기는 유능했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일단락지었으며, 293년에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두 공동 황제와 부제(副帝)가 지배하는 사두 체제를 도입했다.[48] 여러 공동 황제는 50년 이상 서로 대립하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 비잔티온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현 이스탄불)하고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49]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인 395년에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으로 영구히 갈라졌다.[50]

    4세기가 넘도록 서부 지역은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점차 쇠퇴 일로로 치달았다.[51] 4세기에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서고트족이 밀려나 제국 국경 안쪽에 피난처를 구하게 되었다.[52] 401년 알라릭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로마 시를 약탈했다.[53] 반달족은 로마 속주인 갈리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침략하고 455년에 로마를 약탈했다.[54] 476년 9월 4일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55] 1200여 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로마의 서부 지역 지배는 막을 내렸다.[56]

    동로마 제국도 마찬가지 위기를 겪었지만 서쪽보다는 나은 처지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잠시 북아프리카 이탈리아를 수복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고 몇 년이 채 안 되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미쳤던 동로마의 세력 범위는 줄어들었다.[57]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치명적인 전염병 등으로 동로마 제국은 또한 이슬람의 발흥에 위협받았으며, 이슬람 세력은 시리아 이집트의 영토를 곧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직접 위협하게 되었다.[58][59]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8세기경 이슬람의 확대를 막아냈으며, 9세기 초에는 정복당한 땅의 반환을 다시 요구했다.[27][60] 기원후 1000년에 동로마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했으며, 문화와 교역이 번영했다.[61] 그러나 이 정복 이후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하면서 팽창에 제동이 걸렸다. 이 사건은 결국 제국의 쇠퇴로 이어진다. 수백년간 내분과 터키의 침략으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1095년 서방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58] 서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인 우르바노 2세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십자군을 조직하여 동로마 제국에 파견한다. 수십년이 흘러 파견된 제4차 십자군 당시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제국내의 물품을 약탈하고 동로마 제국은 잠시동안 분열되어 몇몇 후계 국가들(니케아 제국, 라틴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에피로스 공국)이 들어서다가 결국 니케아 제국이 최종 승자가 되어 동로마 제국의 왕위를 계승하였다.[62] 제국 군대가 수도를 수복한 뒤 제국은 에게 해 해안에 국한된 그리스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즉위한 황제들은 아무도 제국을 부흥시키지 못하고 결국 동로마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 메메드 2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당하면서 멸망하였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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