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1. 1.

    by. 멀티 존

    728x90
    300x250

    태종(太宗, 1367년 6월 13일 ~ 1422년 5월 30일)은 조선의 제3대 임금(재위 :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이자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개요-성은, 휘는 방원(芳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덕(遺德)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부인 신의왕후 한 씨의 다섯째 아들이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웠다. 왕자 시절 받은 작호는 정안군(靖安君), 정안공(靖安公)이다. 이후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동복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왕위에 올라 공신들을 축출하고, 사병을 혁파하였으며 호패법과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자신의 처가와 사돈 등을 비롯한 왕실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생애
    출생과 가계-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음력 5월 16일) 고려 함흥 부 귀주(歸州)에서 이성계와 부인 한 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어릴 때부터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운 곡 원천석이 태종의 잠자 시절 스승 중 한 명이었다. 1382년(우왕 9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383년(우왕 10년)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급제하였을 당시,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한 씨 부인이 매우 기뻐하였다. 1388년(우왕 15년) 위화도 회군 당시 가솔들과 함께 동북 면으로 피신했으며,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이색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이후,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였다. 특히 부하인 조영무와 함께 정몽주 제거 계획을 세운다. 1390년(공양왕 2년),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임명되었고, 1391년 어머니 한 씨가 사망하자 개성시 상도리에 장사하고 시묘살이하였다. 그러나 정몽주 일파가 이성계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자 경청 강 씨(신덕왕후)는 여 묘 살을 중단시키고 해주로 건너가 이방원을 개경으로 불러내었다.
    역성혁명 활동- 정몽주와 온건파 제거
    1392년(공양왕 4년) 3월, 아버지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굴러떨어져 상처를 입었다.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은신했는데, 어머니 신의왕후 한 씨의 상으로 경기도 영평에서 시묘살이 중이던 이방원은 계모 신덕왕후 강 씨의 급한 부름으로 개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고 그간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을 빌미로 이성계의 가택을 방문하는 등 치밀함을 보인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신의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반대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이왕이면 정몽주를 설득하여 자기 세력으로 끌일 것을 당부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방문했다. 이후 이방원은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택으로 불러들여 마주 앉아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이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받은 시조가 바로 『청구영언』과 『가곡원류』,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해동가요』, 『시가』(詩歌) 등에 실려 있는 《단심가》(丹心歌) 와 《하여가》(何如歌) 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할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할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려라"(이방원 하여가)
    《하여가》라는 제목의 이 시조는 망하기 일보 직전인 고려 왕실을 붙들려 하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정몽주는 이에 《단심가》로 그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티끌과 흙이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겠느냐
    (정몽주 단심가)
    결국 정몽주는 결코 회유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방원은 무사를 보내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이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 이어 그는 이색과 그의 두 아들 및 그의 제자인 이숭인, 길지 등을 축출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그러나 훗날 방원은 1398년 정도전을 숙청한 뒤에 정몽주를 충절(忠節)의 상징으로 현창 시켜 인 양부 원군에 추증하고 영의정 부사를 추서했다. 이는 삼봉 정도전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기도 했다는 일부 평가도 있다.
    조선 개국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군(靖安君)에게 봉해졌다. 원래 장자로 왕세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였던 우창비왕설에 연관된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방어를 제치고, 신하들은 나이와 공로를 감안해 신의왕후 소생 실질적 장남 영암군 이방과 또는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라는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 씨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선택하였다. 1394년 그는 전직 몽골 관료였으며 조선의 외교관이었던 조반 등을 따라 연경과 남경을 방문하여 주원장을 대면하였고, 후의 영락제와도 만났다.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세자 자리를 두고 신덕왕후 강 씨 소생의 의안대군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 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것은 누구보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는 개국 이후 군권 분장 정책을 통해 영암군 이방과 정안군 이방원, 무안군 이방 번, 세자의 매제 흥안군 등에 절제사 직임을 수여해 군권을 분할했으며, 이것은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원칙에 위배되고 군권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놓는 일원적 지배 체제에 위배되었으므로, 개국 초부터 태조의 지시 아래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이방원은 1398년에 부왕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 민 씨의 후원과 이숙번·하륜·조영무 등 사병 혁파 반대 세력, 이화·사촌 이천우·처남 민무구·민무질 등 종친, 외척과 결탁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의 개국공신들과 이복동생인 무한대군 방법·세자 방석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안 가 태조는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영암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바로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다. 이때 아버지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아들들이 그를 지지하고 정안군 이방원이 국정을 장악한다.
    제2차 왕자의 난-하지만 형제들 간에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는데, 이방원의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이 발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에도 이화·이천우 등이 그를 도왔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이후 발포 등을 처형하고 회안대군 부자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때에도 회안대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나왔으나 그를 유배시키는 선에서 불문에 부쳤다. 그해 음력 2월에 정종으로부터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책봉된 지 9개월 만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이후 1401년 음력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 지 고려국사가 아닌 조선 국왕으로 책봉 받았다.
    퇴위와 죽음-
    심온 제거-
    태종은 1418년 8월 10일, 옥새를 충녕에게 넘긴 뒤 수강궁으로 물러났다. 양위를 거두어달라는 청을 거절함으로써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재위한 지 17년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그는 4년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고,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418년 11월 8일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419년에는 둘째 형 정종이 사망했는데, 《정종실록》은 태종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태종이 죽은 뒤에 편찬, 간행되었다. 왕권을 물려준 태종은 줄곧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태종은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등 외척 세력을 숙청할 계획을 세웠다. 병조참판 강상인 이 정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한 것을 빌미 삼아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심온들 영의정 부사에 임명한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는 국문을 친히 주관하며 강상인에게서 십온의 이름이 거론되게 하였고, 삼온이 돌아오기 전 강상인과 심정, 방습, 이관 등을 처형한다. 대질심문할 용의자나 증인도 없는 상태에서 십온은 사사되었다. 이후 소헌왕후가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났으나 아들인 세종 이도의 간청과 애원으로 소헌왕후에 관한 폐출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최후-
    1421년 9월 7일 의정부에서 이미 상왕이었던 태종의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청하여, 개국의 공을 인정받아 태상왕으로 신봉되어 9월 12일 '성덕신공태상왕(盛德神功太上王)'으로 존숭 되었다. 7개월 후인 1422년 4월, 날씨가 화창하여 세종과 함께 철원의 고석정(高石亭) 근처에서 사냥하며 노루와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았고, 또 22일에는 다시 세종과 동교(東郊)에서 매사냥하다가 낙천정(樂天亭)에서 쉬기도 하였는데, 이날 태종은 환궁하였다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1422년 5월 10일, 천달방(泉達坊) 신궁(新宮) [주 1]에서 세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 아들들과 후궁 및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하는 가운데 5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반응형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생애  (0) 2022.11.08
    에이브러햄 링컨 생애  (0) 2022.11.06
    바뤼흐 스피노자  (0) 2022.11.01
    아리스토텔레스  (0) 2022.11.01
    아우구스투스  (0) 2022.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