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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어: Napoléon Bonaparte, 코르시카어: Nabulione di Buonaparte, 이탈리아어: Napoleone Bonaparte, 독일어: Napoleon Bonaparte, 문화어: 나뽈레옹 보나빠르뜨, 1771년 12월 31일 ~ 1821년 12월 31일)는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흔히 나폴레옹(프랑스어: Napoléon, 문화어: 나뽈레옹)으로 불린다.코르시카 섬의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의 군인으로,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공을 세우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 제1통령이 된후 종신통령을 거쳐서 황제에 즉위했다.또한 그는 군사적으로 현대전에까지 영향을 끼쳤고(클라우제비츠, 투하체프스키, 슐리펜 계획) 전술과 전략, 훈련, 조직, 군수, 의복과 포상 제도를 발전시켰다. 그의 프랑스 육군은 효율적으로 조직된 군대로 평가된다. 그가 남긴 나폴레옹 법전은 전 세계의 민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파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프랑스 제1공화국 시절인 1793년에 툴롱 포위전에 참여하여 승리를 이끈후 준장으로 진급하여 22살에 장군이 되었다. 1796년에는 이탈리아 원정에서 대성공을 거두는 등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강력한 반 프랑스 동맹군을 상대로 연승하면서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하였다.19세기의 첫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을 주도하였다.유럽의 강대국들을 상대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국가 자리에 오르게 만들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의 각국들을 분할하고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측근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하게 해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했다.나폴레옹의 몰락은 대륙봉쇄령(1806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야기된 물자부족과 생필품 부족은 유럽 민중들을 고통스럽게 하여 반나폴레옹 감정을 고조시켰다.봉쇄령 위반을 응징하기 위해 시작한 이베리아 반도 점령 실패와 러시아 원정(1812년) 실패로 인해 프랑스 육군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손실을 입었다.. 1815년에 엘바섬을 탈출하여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같은 해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후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남대서양 외딴섬인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보냈다.1813년에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후 대프랑스 동맹군이 1814년에 파리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은 실각하여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어린시절 나폴레옹은:1771년 12월 31일, 이탈리아 서쪽의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8명의 자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나폴레옹의 출생시 이름은 나브리오네 디 부오나파르테(이탈리아어: Nabulione di Buonaparte)였다. 이름을 나브리오네로 지은 것은 요절한 장남인 나브리오네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가문은 본래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하급 귀족 가문으로 16세기에 코르시카로 이주했다. 보나파르트 가문은 조상대대로 법조인을 많이 배출한 법률가 가문으로 나폴레옹의 아버지도 피사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어머니의 출신 가문은 전통적으로 군인 집안이었다.아버지는 변호사이며 귀족회의 의원인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프랑스식 이름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Charles Marie Bonaparte)였으며, 어머니는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였다.나폴레옹이 태어날 당시 코르시카 섬는 격변기속에 매우 혼란스러웠다. 제노바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코르시카인들의 오랜 독립투쟁이 있었고 1755년 독립운동가 파올리가 섬의 대부분을 점령한후 코르시카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빛을 발하는 듯 했다. 이들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제노바는 1768년에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프랑스에게 통치권을 양도하였다.통치권 행사를 위해 프랑스가 코스시카를 침공하자 파올리의 지휘아래 코르시카인들은 무력으로 저항하였으나 1769년 5월 퐁트노보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전세가 기울고 말았다.독립투쟁에 참여하였던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는 임신 6개월 째인 아내를 두고 파울리를 따라 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아내의 배 속에 있던 아이가 바로 나폴레옹이었다.새로운 총독이 프랑스에서 부임하고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 군인들이 마을에 상주하여 어수선한 8월 여름에 나폴레옹이 태어났다.어머니 레티치아의 증언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아주 어릴 적부터 병적인 거짓말쟁이의 징후가 보였다고 한다. 레티치아는 군인집안 출신답게 남성적인 성격에 원칙을 중시하고 규율에 엄격했기에 이런 나폴레옹에게 가차없이 매질을 하고 자주 꾸짖었다고 한다.
-군인 시절-
초임 장교시절:1785년 9월, 16세의 나이에 소위로 임관한 나폴레옹은 10월 28일 파리 육군사관학교를 떠나 같은 해 11월 3일 발랑스에 주둔하고 있던 라페르 연대에 포병장교로 부임했다.마송 도트브리브 대위의 포격 중대에 배치된 후 포병대 수습장교로서 10주간 기본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이수한 후 주어진 임무는 그다지 번거롭지 않았다. 병사관리, 수학, 포대 진지 구축, 화학, 물리학 강의를 듣는 것이었다.군복무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독서를 많이 했는데 주로 역사, 철학, 포병기술에 관한 책들을 많이 보았다.그의 초임 장교시절에는 두각을 나타내거나 뛰어나지는 못했다.퇴근후에는 소설을 습작하기도 했고 휴가를 받아 집을 떠나온지 8년만에 고향에 다녀오기도 했다.1788년에는 라페르 연대가 오손으로 주둔지를 옮기자 그곳에서 근무를 하였다. 급여의 대부분은 고향집에 송금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궁핍하여 허름한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등 여유가 없는 편이었다.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혁명이 발발하자 오손(Autun)에도 혼란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민란이 일어나 과세 대장을 불태우고 총괄징세청부업자의 사무실이 파괴되기도 했다.8월에는 혁명 주도세력인 제헌의회에 의해 봉건제가 폐지되고 권선언이 발표되었다.자유와 평등을 비롯한 혁명사상이 널리 퍼지며 군대 내부 분위기도 어수선해졌다. 바로 수습되기는 했으나 군기가 문란해져서 사병들이 장교를 농락하는 일도 벌어졌다.나폴레옹은 휴가를 얻어 9월말에 귀향하였고 사면받은 후 돌아온 파올리와 함께 혁명으로 어수선해진 코르시카를 안정시키고자 노력했다. 피사대학교에서 법률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있던 형 조제프를 지방의회 의원으로 당선시켰고 자신은 의용대의 부사령관이 되었다.혁명정부는 부족한 병력보강을 위해 지방의회의 의용군 모집과 현역장교가 의용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는 이중군적을 허용했기에 나폴레옹의 활동에는 문제가 없었다.그러나 정작 문제가 된 것은 파올리가 나폴레옹을 탐탁히 않게 생각했다는 점이다.나폴레옹의 지나친 아첨 그리고 과거 그의 부친이 프랑스 측으로 변절한 일로 인해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들을 기회주의 집단으로 판단했다. 파올리는 극단적으로 흐르는 혁명을 비난하며 혐오감을 드러냈다.점차 둘 사이가 벌어지더니 1793년 1월에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다.입헌군주제를 지지하던 파올리는 코르시카의 독립을 고려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국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던 바렌사건과 혁명전쟁중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민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던 사건들을 보며 혁명(자코뱅주의)을 지지했다.원정에 성공할 경우에 코르시카의 권력의 중심은 프랑스 혁명정부가 파견한 군대와 나폴레옹에게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혁명정부는 파올리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파리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보냈으나 파올리는 응하지 않았다.양측의 갈등은 프랑스 혁명정부가 추진한 사르데냐 원정에 나폴레옹이 참여하자 파올리가 교묘하게 방해하여 실패하면서부터 노골적으로 들어났다.나폴레옹과 파올리 간에 알력은 내전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올리가 주민들의 두터운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나폴레옹을 비롯한 반-파올리파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1793년 5월, 파올리 측은 신속히 움직여 나폴레옹을 구금하고 과 농장을 약탈했다. 다행히 나폴레옹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코르시카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무일푼 피난민이 되어 툴롱항에 도착했을 때의 프랑스는 집권한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해있었다. 보나파르트 가족은 귀족가문이었기에 위험할 수 있었으나 나폴레옹의 남동생 뤼시앵이 자코뱅 클럽의 주요 일원이었기에 무탈할 수 있었다.그러나 자코뱅에 반발한 왕당파들이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툴롱도 왕당파가 장악하자 툴롱의 자코뱅파는 툴롱을 탈출하였다. 뤼시앵과 나폴레옹 가족들도 툴롱을 떠나 마르세유로 거처를 옮겼다."나폴레옹의 생애에 대해 포스팅 해요"
다음에는 군인 시절에 대해 포스팅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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