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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프랑스어: Révolution française [ʁevɔlysjɔ̃ fʁɑ̃sɛːz], 영어: French Revolution, 1789년 5월 5일 ~ 1799년 11월 9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프랑스 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발생한 1789년 7월 14일을 기리기 위해서 이듬해 1790년 7월 14일에 진행된 혁명기념 축제가 그 기원이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은 매년 7월 14일로 국경일이자 공휴일이다.프랑스 사회는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앙시앵 레짐(구체제) 하에서 18세기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일반적 특징처럼 자본가 계급이 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되어 있었다.시민과 농민의 개입으로 민중혁명의 단계로 변화된 이 혁명은 3년간에 걸쳐 모든 체제를 전복시켰다. 혁명 소식을 접한 피지배 민족들이 자유와 독립 쟁취 의식에 고취되자 여러 민족을 거느린 유럽의 군주들은 불안감을 느꼈다.이런 가운데 발생한 심각한 경제불황은 인구의 절대다수(98%)를 차지하던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으며 마침내 흉작이 발생한 1789년에 봉기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린 후 80년간 공화정, 제정, 군주정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결국 유럽에 민족주의, 자유주의를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사에서, 정치 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다. 자본주의의 발전기에 있어서 시민 계급이 절대 왕정에 저항하여 봉건적 특권 계급과 투쟁해서 승리를 쟁취했으며 새로운 정부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낸 최초의 사회 혁명이라 할 수 있다.
France revolution -배경-
프랑스는 18세기에 들어와서 혁명 전야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1714년), 미국 독립 전쟁 (1775~1783년)을 비롯한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참여했다. 참전의 결과는 프랑스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재정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의 발전은 영국에 비해서 지지부진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중농주의자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곡물 거래의 자유,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는 세력이 대두되고 있었다. 루이 14세 (재위 1643~1715년)의 말년에 국가 재정은 위기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더욱 심각해지고 만성화되어 갔다. 또한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의 폐지 (1685년)'과 위그노 추방은 프랑스 산업 발전에 심각한 악재로 작용했다. 공업 부문에서도 면직물 공업이 18세기 초부터 부상하기 시작해서 재래의 모직물 · 린네르 공업과 경합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길드의 규제는 여전히 강했으나, 자본주의식 공장제 수공업(manufacture)이 각지에서 증가하고 있었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이해와 대립하는 봉건적 귀족과 그들에 기생하던 특권 상인의 세력을 약화하는 것이 불가피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774년 중농주의자인 재무총감 튀라고는 부르주아의 발전을 저지하던 영주와 국가의 통제를 없애버리려 했다. 1776년에는 ‘여섯 가지 칙령’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농민을 노예 수준의 부담에서 해방하고, 공업에서 길든지를 폐지하며, 농업과 노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발전에 대응하여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는 직조공들의 파업이 18세기 후반에 연이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한편 귀족 계급은 성직자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권 제도와 절대왕권 제의 지지자였던 귀족들 대부분도 재정적 곤란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농민을 더욱 착취하여, 농촌을 거의 황폐화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가 발전하려면 사회적 대변혁이 불가피했었다. 군대에 복무하는 군인 귀족과 법무에 종사하는 법조 귀족이 대표적인 귀족이었지만, 약간의 귀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대귀족은 궁정(宮廷)에 빌붙어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보냈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계몽 사상가는 이와 같은 결합한 사회 제도를 맹비난하면서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선동했다. [4] 당시 프랑스는 계몽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와 백과전서파인 볼테르 등 사회계약설이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국민이 공감하여, 당시의 사회 제도(구체제)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봉 왕가 정부, 특히 국왕 루이 16세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특권 계급과 국민과의 괴리를 채울 수 없었다.
불평등한 사회체제로 프랑스 혁명은 이런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모순에서 발생하였다. 구체제 하에서는 인구의 2% 정도밖에 안 되는 제1계급인 성직자와 제2계급인 귀족은 전체 토지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면세 등의 혜택을 누리는 등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였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던 제3계급(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제3계급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삼부회가 있었지만 175년간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또 재정 파탄의 원인으로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진출을 견제하려고 미국 독립 혁명(1775~83년)을 지원하였으나 과도한 군사비 집행으로 인해 재정 궁핍에 빠지게 된다. 1787년 2월, 재정 총감 탈론은 명사회를 소집하고, 특권 신을 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 지조’를 제안한다. 그러나 귀족·성직자들은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해 재정 안에 저항하였고 그로 인해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우기 위해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졌다. 또한 프랑스 왕실 재정 역시 선대의 향락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났다. 루이 16세에 이르러 재정은 파탄 나고 흉년이 거듭됐으며 1785년 목걸이 사건이 일어나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의회에 미움을 사게 되고 왕실에 대한 불만은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극에 달하게 된다... 그런데도 민중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왕비의 사치가 재정 위기를 초래했다는 오해를 퍼뜨리게 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왕비는 대중에게 미운털이 박혔고 프랑스 혁명기인 1793년 10월 16일 참수형에 처하는 간접적 원인이 된다. 목걸이 사건은 사기꾼 라 신조 부인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을 도용하여 돈과 목걸이를 손에 넣은 사기극으로 재판을 통해 왕비의 결백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민중의 사회 개혁 의지로 제3계급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전문직 일명 부르주아지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써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1, 2신분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노동자, 빈농, 인민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다. 이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직접민주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열망에서 특권층에 의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항거하려는 이념으로 혁명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신봉하였다.
1787년이 되자 상황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악화하였다. 빵의 품귀와 물가 폭등으로 민중의 불안이 증가했고 폭동과 시위가 잇달았다. 1787년 2월 22일, 루이 16세는 144명의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재무부 장관 탈론은 160년 만에 소집된 명사회에서 국가 재정을 살리기 위해 인지세와 토지세 인상 등 세제 개혁을 제안했다. 또한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같은 특권 계급에 대한 과세도 논의 주제로 삼았다. 면세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던 명사회의 대다수는 이를 반대했다. 세제개편 안 때문에 탈론은 정적들로부터 공격받았는데 공금유용 등 비리가 폭로되자 1787년 4월 8일에 루이 16세는 그를 해임하였다. 탈론의 후임으로는 툴루즈 대주교인 브뤼겐을 임명하였다. 새로운 채권 발행, 곡물 거래 자유화 등만 승인하고 명사회는 5월에 해산되었다.-혁명의 전개-
삼부회 소집
명사회는 제1, 제2신분인 귀족과 성직자로만 구성되었기에 면세 특권층인 이들에게 징세 추징을 위한 세제 개혁안을 승인받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도처에서 삼부회 개최에 대한 요구가 빈번했고 1788년 8월 8일, 재무부 장관 무료에는 국왕으로부터 삼부회 소집을 허락받았다. 8월 16일, 국고가 바닥나서 국가 지불 정지가 선언되었다. 8월 25일, 약탈과 폭동이 빈발하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브뤼겐을 해임하고 네케르를 다시 불러들였다. 1789년 초가 되자 삼부회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가 진행되었다. 삼부회에 참석할 대표 선출은 신분별로 일정한 자격과 기준으로 선정된 대의원(선거위원)들이 신분별 회의를 통해 지명,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제3신분(평민)은 지방 의회에서처럼 평민대표의 인원은 2배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결국 루이 16세는 이 요구를 허락하였다. 또한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은 면세 등 각종 특권 폐지와 부동산에 대한 중세적 권리 폐지 등의 개혁을 위해 합동 회의를 통한 토론을 요구했다. 기득권 유지를 원했던 귀족과 성직자들은 신분별 회의 진행을 주장했다. 결국 삼부회는 해결점을 못 찾고 첨예한 대립만 오가며 파행이 이어졌다.
테니스 코트 서약
평민 대표들은 머릿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자신들이 국민의 98%를 대표한다는 주장과 함께 6월 17일에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아울러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평민대표의 도발에 분노한 루이 16세는 측근들과 귀족 대표들의 의견에 따라 '국민의회'의 해산을 명한 후 회의장을 폐쇄해 버렸다. 국민의회에는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던 로마 가톨릭 사제와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합류하였다. 7월 9일에는 제헌 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 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프랑스 혁명으로 바스티유 습격 사건 폐지와 인권선언,
사회 개혁 작업 사건 의회 반발 저항 등
수많은 사건과 변화가 이루어졌다.-혁명의 정신-
1789년 혁명 초기부터 혁명의 슬로건은 자유와 평등, 박애였고 혁명 과정에서 발간된 여러 기록물에서는 세부적인 권리와 당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자유와 평등, 권리로 표현된 경우도 있고 8월 26일에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혁명 슬로건에 부수되는 당면 문제들이 거론되어 있다[110].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히어 자유와 소유권, 안전(생존권), 저항권을 천명하였다. 그밖에 1794년 〈방 토즈 법령 시행규칙〉에 대학생 쥐스트의 기록이나 1795년 총재 정부 헌법에서도 혁명의 목표들은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혁명 정신과 관련하여“박애”를 올바르게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시 집정관 회의이며, 다음과 같은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널리 확산한 혁명 정신의 여파로 다양한 계층에서 분출된 수많은 요구가 혼란의 와중에서 수시로 반영되었고 1793년에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는 자유와 평등, 안전, 소유권을 말하였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이 거론되었다.), 1799년 12월 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는 “소유권,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로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속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간 존중, '인간 존엄'이라는 천부인권 사상이 전제되어 있고 이는 곧 인도주의, 박애주의와 연결되어 이미 혁명정신인 우애, 박애 정신을 당연히 포함한다고 하겠다.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 박애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평가와 영향-
프랑스 혁명은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가장 지성적인 사람들은 환영했고, 영국의 워즈워스, 몰리지 시인 등은 매우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실망하기 시작했다. 공포정치가 프랑스에 출현하였고, 나폴레옹의 독재가 가능케 했다. 콜리비와 워즈워스 시인도 환멸을 느꼈고 본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영국의 감리교 창시자이자 잉글랜드 성공회 신부인 존 웨슬리 신부는 처음부터 이 혁명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이 혁명은 말세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였던 윌리엄 윌버포스도 두렵게 지켜보았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대다수가 이 혁명에 대한 반감이 크게 일어났다. 결과론적인 평가는 프랑스의 왕조를 부르봉 왕가에서 보나파르트 왕가로 바꿨을 뿐, 그 이외의 의미는 없는 혁명이었다. 따라서, 이 혁명의 유일한 수혜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단 한 명이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 글 올려요"
다음에도 좋은 글 올릴게요.반응형'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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