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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신전들은 이집트 선왕조시대 때부터 존재하였으며 문명의 발전에 따라 거의 모든 마을마다 신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전들은 신성한 파라오의 영혼을 섬기는 시체안치소와 지역 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는 신격과 왕권을 밀접히 연관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다만 모든 신이 봉헌된 신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신이 광범위한 숭배를 얻지 못하였으며, 주로 가정에서 숭배되는 신들은 신전보다는 대중 숭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신전들은 신들의 "집"으로써 봉사하였는데, 그들의 매개로써 작용하는 물질적인 상이 보관됐으며 제물이 바쳐졌다.이 봉사들은 신을 떠받드는 데에 꼭 필요한 것으로 믿어졌고, 그래서 그 봉사들은 유지됐다. 신전들은 이집트 사회의 중심점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자원들이 신전의 유지를 위하여 쏟아부어졌다. 파라오들도 신들의 영광을 고양하는 의무를 위하여 신전 건축과 재정 지원을 하였기 때문에, 많은 신전이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 건축물인 카르나크의 아문 신전처럼 빠른 속도로 금전적으로나 실질적으로 거대해질 수 있었다.
신왕국에서는 고왕국과 중왕국의 신전들로부터 발전한 구체적인 기본 신전 설계가 등장하였다. 변화들과 함께 이 계획은 그 시대에 지어진, 오늘날 여전히 남아있는 신전 대부분에 사용되었다. 이 표준적인 설계에는 동쪽을 향하는 중심축을 따라 정렬되어, 가장 일반적으로 나일 강을 따라서 신전이 지어졌다. 신전들의 주요 입구는 보통 행렬식이 신전을 둘러싼 벽을 통과하여 오는 방향인 나일 강 쪽으로 지어졌다. 신전의 주 입구를 통과하면 대체로 하나의 혹은 더 많은 탑문(파일론)을 또 다시 통과하여야 했다. 이 파일론들을 거치면 열주로 이루어진 안마당이 나오는데, 이 안마당은 보통 봉헌물을 배달하고 사제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안마당을 지나면 많은 기둥으로 천장을 떠받친 거대한 방이 위치하고, 그 뒤로는 사원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둘러싸는 보조방들은 신전에서 매일 행해지는 종교의식을 위하여 사용됐다
탑문과 안마당, 열주들을 통과하여 신성한 사원에 도달하는 신전의 구조는 인간의 세상에서 신의 세상으로 가는 여정을 의미한다. 사원은 신전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이며, 신전이 모시는 신의 성상들이 모셔져 있다. 사원으로의 접근은 주로 파라오와 고위 성직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종교의식의 봉헌물은 전통적으로 파라오가 직접 혹은 파라오를 대리하는 사제들에 의하여 아침과 저녁에 바쳐졌다. 이 종교의식에서 파라오나 사제들은 신의 석상을 씻고, 성유를 바르고 공들인 의복을 입히며 음식을 바쳤다. 그 후에 신이 제물의 영적인 본질을 모두 소모하였다고 판단되면, 바쳐졌던 제물들을 사제들이 나누어 가졌다.매일 바쳐지는 제물의식을 비롯하여 해마다 있는 축제에서도 종교의식을 치렀으며 특별한 상황에서는 보기 드문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 많은 종교의식은 신들의 형상을 다른 신성한 장소로 운송하는, 무질서의 힘을 파괴하는 의미나 새로운 교리를 공표하는 의미가 있는 행렬을 포함하였다.
신전들은 자신들의 소유지를 통한 수입뿐만 아니라 지방의 관리나 군주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이 소유지들에 포함된 토지나 농장, 정원, 광산, 채석장, 장인조합 등은 신전의 필요에 따라 생산물을 봉납하였다. 거대한 신전들은 종종 수천 명에 다다르는 사람들을 고용할 정도로 중요한 경제적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사제
파라오는 이론상, 공식적인 이집트 신들의 대리자였기 때문에, 모든 신전의 사제들은 그의 명령하에 있어야 했다. 사실 고왕국과 중왕국동안에는 사제들의 계급이 없는 대신에, 정부의 공무원들이 일 년 중 몇 개월 동안 세속에서 떠나 신을 섬겼다. 비록 대부분의 낮은 직위의 사제들이 전과 같이 여전히 시간제로 일은 하였지만, 신왕국에 들어서서 전문적인 사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파라오는 신들의 대리자로서 모든 사제에 대한 임명권을 가졌다.하지만, 신전의 부가 축적되면서 사제들의 영향력도 파라오를 위협할 만큼 강해졌다. 결국 제3중간기에 들어서서는 아문신을 섬기는 테베의 사제들이 상이집트를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신전마다 사제들은 다양한 직위와 종류가 있었다. 신전의 밖에서 평민들의 장례식을 돕는 일을 하는 사제들도 있었으며, 신전에서 기도문과 주술을 암송하고 연구하며 장례식을 집례하는 성직자들도 있었다.가장 높은 직위의 성직자는 '신들의 첫 번째 종'이라 불리었는데, 이 관직은 종종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상습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신전들은 그들이 필요한 농부와 장인, 음악가, 성가대를 포함한 많은 외부인을 고용하였다. 모든 이들은 신전의 수익으로 월급을 주었다.
사제들은 주로 남성이었는데, 고왕국 때에는 많은 여성이 여신을 위한 신전에서 성직에 몸을 담았다. 하지만, 중왕국에 들어서는 여성들의 공직업무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후기에는 더 적은 수의 여성들이 신전에서 활동하였다. 다만, 제3중간기에는 중요한 여성들이 아문신을 비롯한 신들의 종교의식에 참여하였다.
성직에 몸을 담은 동안, 사제들은 엄격한 청렴도를 준수하여야 했다. 그들은 머리와 몸들을 모두 면도해야 했으며 늘 깨끗한 옷을 입고 하루에도 몇 번씩 씻어야 했다. 반드시 독신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육체관계는 정신적 순수함에서 멀어진다 하여 꺼렸다.
축제
고대 이집트 인들은 다양한 종교적 축제들을 거행하였다. 대부분이 1년 주기로 축제가 열리거나,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새해를 축하하는 축제와 같은 큰 행사는 이집트 전 지역에서 이루어졌지만, 대부분은 특정한 신전이 있는 지역에서만 축제를 즐겼다. 신전에서 주최하는 축제들은 보통 신의 모습이 새겨진 조각이나 조각상을 배모양의 가마에 싣고, 그것을 들고 신전 밖으로 행진하는 의식을 포함했다. 일반인들은 사제들과 함께 이 의식을 축하하였으며, 행렬을 관중하거나, 신에게 특별한 봉헌 물들을 바쳤다. 몇몇 축제들은 파라오의 왕권에 대한 숭배의식을 주제로 삼기도 하였는데, 이 축제들은 대관식이나 세트 축제, 파라오의 부활을 기원하는 내용을 포함하였다.
신탁
이집트인들은 지식이나 계시를 위하여 신들에게 신탁을 물었는데 주로 신왕국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파라오를 포함한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신의 계시를 듣고자 하였고 특히 신왕국 후기에서는 신탁에 의하여 국사의 방향이 바뀌는 등 왕권 및 내사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일반적으로 신탁을 받는 방식으로, 축제에 신의 형상이 안치된 돛단배의 움직임을 해석하는 것이였다. 다른 방식으로 동물 숭배나 제비 뽑기, 신의 조각상을 대변하는 사제의 발언 등을 통한 신탁이 존재하였다. 이는 신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 사제를 통하여 신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의미이다.
마술
"마술"이란 단어는 "간접적으로 어떤 것을 일으킬 수 있음"을 의미하는 이집트어의 "헤카"로 번역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헤카를 자연적인 현상 중 하나로 믿었으며, 이 힘은 우주를 창조하고 신들이 자신의 업적을 행하는데 쓰인다고 생각하였다. 인간들도 이를 사용할 수 있으나 마술 연습을 통하여 종교와 밀접하게 서로 영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신전에서는 정기적으로 미리 정해진 마술로써 종교 의식을 치렀다.또한, 개인들도 종종 죽음을 위한 마술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비록 이 마술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고 믿어졌으나 마술의 무형성은 타인에게 저주를 하는 자에게도 해롭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그 대신에 마술은 주로 해로운 것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고 막아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마술은 사제들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신전의 도서관들은 다수의 마술 주문서들을 소장하였고, 많은 주문이 신전의 책들 내용 문맥에서 쉽게 발견됐다. 이 위대한 마술 지식은 이 책들을 연구하는 사제들에 의하여 축적됐으며, 종종 신자들을 위하여 사용되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마술들은 그들의 신앙생활이나 사람들을 치유할 때, 마술이 깃든 장신구를 만들 때 사용됐다. 농민들도 풍작을 기원하기 위하여 간단한 마술들을 사용하였는데, 이 마술지식은 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관련 사료들은 현대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장례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시신의 보존은 영혼(바)의 생존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 개념이었기 때문에 장례의 중요한 부분이다. 원래 이집트 사람들은 건조하여 자연적으로 시신이 부패되는 것을 막는 사막에 시신을 묻어 미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초기왕조 시대에 들어와서 이집트인들이 시신의 보호를 위하여 무덤을 사용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시신을 자연적으로 건조시켜 보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건조시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시신 방부제가 개발되었다. 시신의 내장을 제거하고, 천연탄산소다를 이용하여 시신을 건조한 후 아마포로 감싸 관에 넣는 이 과정은 신왕국 시대에서도 여전히 완전히 개발되지 않았었다.이 과정의 질은 비용에 따라 달라졌으며, 누구도 사막에 묻는 것만큼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막는 방법을 찾지는 못하였다.
한번 미라화 과정이 끝나면, 미라는 사망한 사람의 집에서 무덤까지 사제들이 이끄는 친인척들의 장례 행렬을 통하여 옮겨진다. 장례 행렬이 무덤의 입구에 다다르면 사제에 의하여, 장례 도구로 죽은 사람으로서 봉헌 물을 받을 자격을 인정해주는 '입을 여는 의식'을 포함한, 몇 개의 종교의식이 치러진다. 그러면 미라는 안치된 후 무덤은 봉해진다.그 후에 친인척이나 사제가 무덤 입구 앞에 음식을 바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덤은 한두 세대가 지나면 불가피하게 자손들에게 잊혀졌다.
이집트의 첫 번째 무덤은 직사각형의 벽돌로 지은 파라오나 귀족들을 위한 석실분묘이다. 각각의 석실분묘는 지하의 시신 안치실과 지상의 예배당으로 분리되었다. 고왕국의 석실분묘는 이집트 창조신화에 나오는 언덕을 상징하는 피라미드로 발전하였다. 피라미드들은 왕족들에게 제한되었으며, 거대한 시체 안치소를 포함하였다. 중왕국의 파라오들도 고왕국의 피라미드들보단 작은 규모의 피라미드를 지었지만, 석실 분묘의 대중성에 피라미드 건축 의지는 시들어 갔다. 점점 더 많은 평민이 시체안치소와 예배당이 분리된 바위를 파서 만든 석실에 매장됨에 따라 도굴하기에 더욱 어려워졌다. 신왕국이 시작함에 따라 파라오들도 그와 같은 무덤들에 매장되었고 이집트 종교가 쇠퇴하기 전까지 이와 같은 장례의식은 계속되었다.
시신은 다양한 시신이 훼손될 경우를 대비한 죽은 자의 조각상과 미라화 과정에서 시신에서 빼낸 내장을 담은 항아리들을 포함한 제물들과 함께 무덤에 묻혔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후세계에서도 일해야만 했는데 조각상이 죽은 자를 대신하여 일을 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이 조각상들은 초기 파라오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부유한 자들의 무덤들은 사후세계에서 사용할 비싼 가구들과 옷들을 포함하여 영혼의 세계로 가는 길을 지켜줄 마술이 깃든 귀금속을 같이 매장하였다. 더 나아가서 무덤의 벽화나 수의, 아마포, 파피루스 등에 새겨진 장례문헌을 통하여 사후세계에 안전히 도착하기를 기원하였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신들이 동물의 모양으로 내세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애완동물이나 야생동물들을 인간과 같이 미라로 만들어 매장하였다. 이러한 동물 매장은 창조신 프타가 동물화된 아피스 황소를 비롯한 몇몇 동물들에게만 해당되었던 것이 그 기원이었으나 이집트 제26왕조가 시작되면서 신들을 상징하는 동물들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신자들은 신에게 바치기 위한 동물 미라를 사기 위하여 특정 신의 사제들에게 돈을 냈으며, 신전이나 그 주변에 미라를 두어 신을 모셨다. 어떤 토굴에서는 약 백만개의 동물 미라가 발견된 것을 보면, 동물 숭배의식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종교의 역사
선왕조
고대 이집트는 고고학적 연구가 매우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고고학적 발견으로 말미암아 이집트의 종교는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선왕조시대 장례 매장 방식은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의 초기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동시대에 매장된 동물들은 후기 이집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동물형태 신들의 기원도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초기 이집트시대에는 사람이나 신의 모습을 재현한 토우들도 발견되었고,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동물 형태의 신들보다는 사람 모습을 한 신들의 출현이 더 늦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학자들은 초기 이집트의 종교는 지역마다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으나, 이 작은 지역들이 서로 정복하고 정복되면서 서로의 신들이 각각의 신화에 편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이론은 고대 이집트 종교가 복잡한 다신론적인 종교로써 어떻게 지역의 수호신들이 전국의 보편적인 신으로 자리 잡게 되는지 설명해준다.
그런 와중에 약 기원적 3000년경에 상·하 이집트가 통일되면서 초기왕조가 들어섰다. 새로운 왕조에서 특정 신이 국가 중요의 신으로 부각 되고 파라오가 신격화되는 등 이집트 종교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집트 제1왕조의 파라오들과 같은 초기의 왕들은 막대한 돈과 인원이 투입된 무덤에 매장되었는데, 당시에는 사후세계에서 왕의 시중을 들어줄 사람을 같이 매장하는 순장제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매장 방식은 왕족의 장례의식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설명한다. 고위 관료들과 귀족들은 하급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고왕국과 중왕국
고왕국 시대를 통하여 주요 신들의 사제들은 각각의 다른 신화와 문화를 가진 여러 신을 단체로 묶어 조직화하는 것을 시도하였다. 헬리오폴리스와 헤르모폴리스, 멤피스의 신학이 발전함에 따라 이 시대에 혼합주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고왕국 시대에는 중요한 왕족이 아닌 귀족들이 여전히 석실 분묘에 묻혔지만,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들이 석실 분묘를 대신하게 되었다.피라미드들은 거대한 장례 신전의 집합체로써, 이집트의 신전 건축 개발에 굉장한 역할을 하였으며,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왕국 시대에는 헬리오폴리스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종교 도시가 되었고 그 도시의 수호신인 라의 영향력은 매우 막강해졌다.[제4왕조는 기존 계단식 피라미드를 태양 광선을 상징하는 정방형 피라미드와 같은 모습으로 바꾸었다. 제5왕조에 의해서 태양신 라는 왕권과 사후세계와 관련되어 국가적 신으로 추앙받았다.동시대에는 오시리스 또한 사후세계의 주요한 신이 되었다.
제5왕조 말에 파라오들은 그들의 무덤에 피라미드텍스트를 새겨 놓기 시작하였다. 이 기록들은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태양과 오시리스식의 사후세계 개념뿐만 아니라 선왕조시대의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도 포함하였다. 그래서 피라미드 텍스트는 고왕조와 그전 시대의 이집트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기원전 22세기에 고왕조는 몰락하여 고왕조 시대 동안 발전했던 이집트 종교의 결과물들과 함께 무질서적인 제1중간기에 진입하였다. 고왕조시대에는 사후세계에서의 부활을 왕족에 제한하였었지만, 제1중간기에 들어 사회적 계층의 장벽이 무너짐에 따라 모든 이집트인이 "사후세계의 민주화"라 불리는, 모든 이들에게 맞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사후세계에 대한 오시리스식의 관점은 일반인들에게 더욱 매력 있어졌고, 그 때문에 오시리스는 가장 중요한 신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집트를 재통일한 중왕국의 새 왕조는 테베에 기반을 둠에 따라, 그들의 수호신인 몬수가 국가적 신으로 숭배되었다. 하지만, 중왕국 후반에 들어 이 신앙은 테베의 새로운 수호신이 된 아문의 부상과 함께 빛을 잃었다.
신왕국
기원전 1872년 중왕국의 마지막 왕조인 제12왕조가 몰락한 이후, 제 2중간기가 도래하였다. 하지만, 다시 기원전 1570년경에 신왕국의 첫 파라오인 테베의 지배자들에 의하여 재연합되었다. 제18왕조는 테베의 수호신인 아문을 강력한 신으로 증진시키고 오랫동안 왕권을 수호하는 신으로 여겨진 태양신 라와 융합했다. 테베에 있는 아문-라의 카르나크 신전은 이집트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이집트가 외국과 교류를 활발히 하게 되면서, 근동의 신들도 많이 흡수했다.신왕국시대에 정복된 누비아에서도 그 지역 신들이 이집트로 흡수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아문신의 특징에도 영향을 끼쳤다.
신왕국의 종교적 전통은 기원전 1350년에 아멘호테프 4세가 파라오가 되면서 깨졌는데, 당시 왕권을 지나치게 간섭하던 테베의 신관들을 견제하고자 그는 아톤이라는 유일신으로 아문의 신적 지위를 교체했고, 자신의 이름도 '아톤의 종'이라는 뜻의 아크나톤으로 개명하였다. 또한, 그는 이집트의 수도를 새로 지은 아마르나로 천도했다. 고고학자들과 미술사학자들은 이 시대를 아마르나 시대라고 부른다. 아크나톤은 전례가 없는, 아톤의 외관으로써 태양 그 자체를 숭배의 유일한 매개자로 섬겨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아톤주의는 발전한 신화관이나 신학 바탕도 없었고 비인격성과 그로 인한 거리감 때문에 이집트인들에게 감흥을 끌지 못했다.일반 민중 사이에서는 여전히 비밀리에 기존 신앙을 믿었다.그럼에도 고대 이집트 정부는 이집트 사회의 기반이 되는 다른 신들에 대한 금전적 지원과 투자를 중단했다.민중의 지지가 없었던 아텐주의 신앙은 결국 아크나톤의 사후, 아크나톤의 후계자인 투탕카멘이 모든 아텐주의 기념물을 파괴하고 전통 신앙을 부활시킴으로써 끝을 맺었다.
아마르나 시대의 결과물들을 후대 파라오들이 제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장기간에 걸쳐 파라오의 종교에 영향을 끼치며 쇠퇴했다. 아톤주의 신앙이 끝난 후 그에 대한 사회적 반동 때문에 대중들은 평상시에도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신들을 믿었고, 그로 인해 파라오의 신성은 줄고 인간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더군다나 아몬 신앙의 부활로 말미암아 테베 사제들의 권력은 더욱 신장했고, 이는 신왕국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제국
기원전 1000년경부터 매우 쇠약해진 이집트는, 외부에서 침입한 리비아인과 누비아 인들과 같은 외국인들에게 점령당하여 혼란스러운 제3중간기를 보냈다. 이 시기에는 정권의 불안정과 외국문화의 영향 등으로, 이집트 숭배 형태의 특징으로서 동물숭배가 대중화되었다.특히 제3중간기에는 여신 이시스가 더욱 대중화되었고,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여신으로 숭배받게 되었다.
기원전 4세기에 이집트는 제32왕조라고도 불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치하에서 주로 전통적인 종교와 건물을 건설하고 많은 신전을 복구하면서 헬레니즘 문명을 꽃피웠다. 그리스에서 유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존 이집트 종교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일시하게 되었고, 그리스와 이집트의 문화를 결합시키기 위하여 두 문명의 신들을 세라피스(오시리스와 아피스)와 같이 혼합하였다. 그럼에도 두 종교의 특징 대부분은 각자 분리된 상태로 유지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가 기원전 30년에 자살한 이후, 로마의 황제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왕좌를 대신하여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면서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종교 제도는 이집트가 사실상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변하게 되었다.이시스 숭배의식은 그리스와 로마를 비롯한 해외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헬레니즘 문명화되어 로마 제국 전체에 걸쳐서 퍼져 나갔다.그러나 정작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종교의 신학과 신앙을 비롯한 교세는 신전이 있는 섬과 지역에 한정되는 소규모로 점점 축소되었다.
이집트 종교는 결국 기원후 1세기에 배타주의적 일신교인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더욱 쇠퇴하였으며, 서기 383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고, 이집트를 비롯한 모든 로마 제국의 영토에 있는 이집트 종교 관련 신전은 이교도로 취급되어 강제로 폐쇄되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이집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으나 사실상 죽은 종교가 되었다.
영향
이집트 종교는 고대 이집트 사회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기념물인 수 많은 신전들과 무덤들을 생산하였으며 수 많은 문화들에 거대한 영향을 남겼다. 파라오 시대의 스핑크스와 태양 원반등을 비롯한 다양한 상징과 기호들은 지중해와 근동을 넘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리스인들의 엘리시온의 발상은 이집트의 사후 세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많은 학자들은 유대교 또한 이집트의 아텐주의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171] 고대 후기에 시작된 기독교의 지옥에 대한 개념 역시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두아트와 닮은 점이 많으며 성모마리아 또한 이시스와 호루스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이집트 종교는 영지주의의 탄생과 개념화에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는 이집트인들이 믿었던 비밀스러운 마법 지식과 혼합된 토트 신앙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신앙의 자취는 현대의 이집트 민족 문화속에서도 남아있다. 특히 1798년 프랑스가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면서 이집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서구 문명은 처음으로 고대 이집트 종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이집트 종교의 다양한 내용을 서양 예술의 주제로 받아들였다. 이집트 종교는 대중 문화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신이교주의 운동과 함께 '케메티즘'이라는 이름으로 재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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