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프랑스어: Jean Calvin [ʒɑ̃ KALɛ̃],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 혹은 장 칼뱅은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것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를 강조하였고, 개혁주의라고도 불리는 기독교 사상 중 하나인 칼뱅주의의 시초를 놓았으며, 마르틴 루터·울리히 츠빙글리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장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로는 회중 교회, 개혁 교회, 장로교회가 대표적이다. 또한 칼뱅은 상공업자들의 불리한 신분사회에서 직업 소명설로 평등을 보장하였다. 윌리엄 커닝엄은 그를 사도 바울로 다음으로 인류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았다. 찰스 슬퍼 전은 자신이 오래 살수록 점점 더 그가 만들어 놓은 체계가 완전에 가깝게 생각된다고 말했다. [1]
개요
칼뱅은 기독교 변 증가로서 많은 논쟁을 벌였고, 필리프 멜란히톤과 하인리히 불링 거 등 많은 종교개혁가와 긍정적인 내용의 서신들을 교환했다. 저술가로서 《기독교강요》(1536)를 썼는데, 이 책은 이후 기독교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역사와 문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성경 주석이나 신학 논문을 저술했다.
인문주의 변호사로 교육받았으며, 1530년경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회심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도에 대한 광범위한 폭력 사태로 긴장이 고조된 후, 스위스의 바젤로 피난하여 1536년에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했다. 같은 해에 제네바의 프랑스인 기욤 파렐에 의해 등용되어 제네바로 이동한 뒤, 도착한 한 주 내내 설교하였다. 그러나 시의회는 그들의 주장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 둘은 모두 추방되었다. 이후 마르틴 부서의 초청으로 스트라스부르로 나아가 그곳에서 프랑스 난민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제네바에서 벌어지는 개혁 운동을 계속 지지하였고, 결국 1541년에 다시 초대받아 제네바의 교회를 이끌었다.
칼뱅은 복귀 후에 몇몇 도시 권력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형태의 교회 정부와 예전을 도입했다. 이 기간에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도착했는데, 그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 모두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자신만의 특유 반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따라서 칼뱅은 그를 고발했고, 시의회는 그를 화형에 처했다.
그를 지지하는 개신교도 난민들이 도시에 유입되고 새로운 시의회가 구성됨으로써 칼뱅의 반대자들은 도시에서 쫓겨났다. 칼뱅은 제네바 대학교를 세우는 등 제네바와 유럽 양쪽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는데 말년을 보냈다.
생애
출생과 학창 시절 1509~1536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있는 장 칼뱅 동상. 프랑스의 조각가 다니엘 르클레르크(Daniel Leclerc)가 제작하였다. 요한 칼 빈탄 생 500주년 기념 사업회에서 제작함
유년과 마르세요 재학시절
칼뱅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의 무아용에서 잔 르프랑Jeanne Le Franc와 제라르 코 백Gérard Cauvin 부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 본명은 주앙 코뱅Jehan Cauvin이다. 캉브레의 여관 주인의 딸이었던 모친은 칼뱅을 낳고 네 명의 아이를 더 낳은 뒤 칼뱅이 어릴 때 사망했는데,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칼뱅의 부친은 대성당의 공증인과 교회법정의 등록사무관으로 일했으며, 고환암으로 1531년에 사망하였다. 제라르와 잔 르프랑 사이에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샤를은 로마 가톨릭의 사제가 되었지만 1537년 이단으로 고발되어 파문된 채 사망했다. 둘째가 칼뱅이었고, 셋째인 앙투안은 제네바에서 칼뱅과 합류하여 칼뱅의 신실한 협력자로 일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동생인 앙투안과 프랑수아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이후 르프랑이 사망하자 제라르는 재혼하여 딸을 두 명 낳는다. 이 두명 중 한명의 이름은 마리이다.[3][4][주해 1]
칼뱅이 처음으로 다녔던 학교는 누아용의 소년학교 카페트Collège des Cappettes a Noyon였다. 12살에는 성직자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었고, 가톨릭교회에 헌신하겠다는 의미의 삭발례를 받았다. 그 당시 몽모르Montmors가의 후원을 받았다.[3]
1523년 8월, 14세의 칼뱅은 몽모르가의 소년들과 함께 학업을 위해 파리로 이주한다. 칼뱅은 파리에서 처음에는 리샤르 삼촌의 집에 머물렀으나, 두 달 후에 라 마르슈 학교College de la Marche에 정착한다.[주해 2] 거기에서는 마튀랭 코르디에Mathurin Cordier에게 라틴어 문법을 배운다.[주해 3] 코르디에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칼뱅은 비록 몇 달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코르디에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이후 1562년에 칼뱅의 요청으로 제네바에서 가르침을 이어갔다.[5]
몽테귀 대학
칼뱅은 마르슈에서 라틴어 과정을 마친 뒤, 1523년 말 파리 대학교의 몽테귀 대학으로 옮겨와 철학과 수사학 등을 배우며 학업을 이어갔다.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칼뱅은 요안네스 칼비누스(라틴어: Ioannes Calvinus)로 개명하여, 이후 사람들에게 장 칼뱅(프랑스어: Jean Calvin)으로 알려지게 된다. 몽테귀에서 칼뱅은 인문학자이자 종교개혁에 많은 영향을 준 에라스무스와 라블레 등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6]
이 기간 동안 칼뱅은 프랑수아 1세의 왕실 의사였던 기욤 콥Guillaume Cop의 네 아들들과 친분을 쌓는데, 이후 니콜라스 콥이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528년 파리에서 학업을 시작한 로욜라도 역시 장 칼뱅과 비슷한 시기에 이 몽테귀 대학에 다녔는데,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장 칼뱅
법학 공부
1527년 칼뱅의 아버지는 누아용의 교회 참사회와 직무상의 일로 인해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는 교회와의 마찰로 장학금이 취소될 지 모른다는 우려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칼뱅에게 신학보다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주해 4]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칼뱅은 1528년 초 무렵 유명한 법학자 피에르 드 레투알Pierre Taisan de l'Estoile이 강의하는 오를레앙 대학교로 옮겼다.[주해 5] 이 기간에 사귄 다른 친구들로는 프랑수아 다니엘, 프랑수아 드 코낭, 니콜라 뒤슈멩 등이 있다.[8] 1528년에는 사촌인 피에르 로베르 올리베탕에 의해 종교개혁을 접하게 된다.[9] 이후 1529년 여름, 칼뱅은 친구 프랑수아 다니엘, 니콜라 뒤슈맹Nicolas Duchemin과 함께 부르주 대학교로 옮겨가 안드레아 알치아티의 강의를 들었다.[10] 칼뱅은 부르주에서 8개월간 머무르며 신약성경 연구에 필수적인 코이네 그리스어를 배웠다.[10]
칼뱅은 1531년 3월 니콜라 뒤슈맹의 《반박문Antapologia》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는 1531년 3월 6일에 이 책의 서문을 썼는데, 이는 칼뱅의 첫 출판물이 되었다.[11] 칼뱅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누와용으로 달려가나, 제라르는 1531년 5월 26일에 사망한다. 사망하기 2년 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제라르가 파문되었기 때문에, 칼뱅의 형 샤를은 아버지를 교회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교회의 참사회와 협상해야 했다. 파리로 돌아간 칼뱅은 포르테 대학Collège Fortet에 정착하여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여기서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을 알게된다.[12] 이후 1532년, 법률 자격licencié ès lois을 취득한 뒤 4월 4일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De Clementia》를 주석하여 출판한다.[13] 오를레앙에는 5월에 되돌아와 법률 공부를 마친 뒤 1533년 10월에 파리로 돌아간다.
개종
칼뱅은 법학 공부를 하던 1529년 말에서 1530년 초에 개종의 기미를 보이다, 이후 1533년의 연설문에서 직접적인 증거를 보인다.[14] 칼뱅은 자신의 개종에 대해 상반된 묘사를 두어번 했는데, 그중 첫 번째는 시편 주석에서 나타난다. 여기서는 신이 불러온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로 개종하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갑작스런 개종으로 나를 복종시키시고 내 마음을 온순한 틀로 이끌어 주셨는데, 이는 내 생애 초기에 기대했던 것 보다 그런 부분에서는 더욱 단단한 것이었다. 진정한 경건함에 대한 미각과 지식을 어느 정도 받은 고로, 나는 즉시 진보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올라 비록 다른 학문을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덜 열정적으로 그것들을 추구했다.[15]
두 번째 증언에서는 내면의 혼란의 긴 과정을 묘사했는데, 정신적, 심리적 고뇌도 엿보인다.
괴로움 속에 빠져들어 몹시 불안해했고, 영원한 죽음의 비참함에 대해선 더욱 불안해했습니다. 의무감에 묶여 지난 삶을 비난하며, 저를 당신의 길로 가게 해달라고 처음으로 신음과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 주여, 이 가련한 자에게 남아있는 것은 방어막이 아니라, 무서운 말씀으로 저를 심판하여 황야로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비는 것 뿐이온데, 마침내 당신은 놀라운 선하심으로 나를 인도해내셨사옵니다.[16]
학자들은 이러한 상반된 증언들의 정확한 해석에 대해 논쟁한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떠난 것과 개종 시점이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에 동의한다.[17][18] 이 두 증언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기억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19]
장 칼뱅의 석판화, 추정 1830년
《기독교 강요》
1533년 11월 1일, 니콜라스 콥은 파리 대학교 학장 취임식에서 기독교 철학, 법과 복음의 관계 등을 들어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취임사를 펼친다. 루터의 사상이 드러나는 이 연설문은 곧 프랑스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바로 이 연설문을 칼뱅이 작성했다.[20] 교직원들은 이를 이단적이라고 비난했고, 파리 국회는 연설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이후 니콜라스 콥은 소환당하기 전에 바젤로 도망친다. 프랑수아 1세는 “저주받은 루터 이단”을 박해하기로 결심했다. 콥의 연설문을 쓴 칼뱅도 이듬해 책과 편지들을 남겨 둔 채 체포되기 전에 도시를 몰래 빠져나가 1533년 말 혹은 1534년 초 즈음에 파리 남부의 생통주 지방으로 이동한다. 칼뱅은 샤를 데스페비유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1533년 12월부터 1534년 4월까지 클레교구 목사이자 앙굴렘에 있는 개신교 교회의 참사회원이었던 루이 뒤 티에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무르며 《기독교 강요》 초판을 구상하였다.[12][21] 또한 당시에는 25세가 됐을 때 교역자가 되지 않으면 교회의 봉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이를 포기한다.[22]
칼뱅은 위험을 무릅쓰고 파리에 있는 에티엔 드 라 포르주Étienne de la Forge의 집에서 하숙을 한다. 플람스의 설교자이자 유명한 재세례파 지도자인 캥탱 티프리Quintin Thieffry도 여기서 만난 것으로 보인다. 파리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세르베투스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칼뱅은 뒤 티에와 함께 끌레를 경유하여 푸아티에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갔다. 그리고 칼뱅은 그 곳 도시 외곽 생브누아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칼뱅은 푸아티에를 떠나 뒤 티에와 함께 오를레앙을 여행하며 《영혼불멸Psychopannychia》을 집필했다.[12]
1534년 10월 17~18일 밤, 벽보 사건이 일어남에 따라 프랑수아 1세가 조치를 취해 11월에는 수백 명이 체포되어 몇 달 동안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는 칼뱅의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라 포르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의 반 개신교 정서는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1535년, 칼뱅과 뒤 티에는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피해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종교개혁가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의 보호를 받고 있는 도시인 바젤로 갔다.[23][24][25]
칼뱅은 바젤에서 마르티아누스 루카누스Martianus Lucanus라는 가명으로 지내며 외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와 스트라스부르의 목사인 볼프강 카피토 등과 교제하였다.[23] 칼뱅은 이 외에도 학자 세바스티안 뮌스터, 변호사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 미래의 제네바 동지인 피에르 비레 등과 친분을 쌓았다. 1535년 6월 4일에는 올리베탕에 의해 불어 성서 번역본이 출판되었는데, 라틴어로 된 추천사는 칼뱅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신약성경 첫 페이지 앞에 달린 두 번째 추천 서문은 익명이었지만 1545년 이후부터는 칼뱅의 것으로 간주된다. 칼뱅은 이 번역본의 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에 칼뱅은 고대 교회의 교부 중 한 명인 크리소스토모스 주교의 설교집에 추천 서문을 썼으며 《기독교 강요》의 작업도 계속하여 1535년에는 책을 완성시킨다.[12] 칼뱅은 이 책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기독교 강요》의 라틴어 초판은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되어 빠르게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는데, 이 작품으로 칼뱅은 종교개혁을 주도하게 되었다.[26] 1536년 2월에는 하인리히 불링거와도 사귀게 되었다.[주해 6] 에라스무스는 1535년 6월 바젤에 정착하여 이듬해 7월 12일에 사망하는데, 칼뱅이 그를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망명
《기독교 강요》가 출간되기 바로 직전인 1536년 2월, 칼뱅은 이전에 사용했던 샤를 데스페비유라는 가명으로 루이 뒤 티에와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이 때 국왕 루이 12세의 딸이자 프랑수아 1세의 친척인 레나타 공작 부인의 페라라 궁정에서, 같은 개혁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수 주간 머무른다.[주해 7][27][28] 페라라에서 칼뱅은 프랑스로부터 피신해 온 개신교도들과 만났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의 시인 클레망 마로도 포함되어 있었다.[주해 8]
칼뱅과 뒤 티에는 아오스타를 거쳐 바젤로 돌아왔다. 망명객의 귀환을 허용하나 6개월 안에 공개적으로 이단과 관계를 단절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특별 사면령이 프랑스에서 공포되자 칼뱅은 곧장 프랑스로 돌아갔다. 파리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한 뒤, 프랑스를 영원히 떠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자 물려받은 누아용의 토지를 처분하고, 남동생 앙투안, 여동생 마리와 함께 바젤을 떠난다.[29] 칼뱅은 자유제국도시였던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마칠 계획이었으나, 제6차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의 이동을 피해 제네바로 우회하기로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