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1. 2.

    by. 멀티 존

    728x90
    300x250

    상당수 인공지능 연구의 (본래) 목적은 심리학에 대한 실험적인 접근이었고, 언어 지능(linguistic intelligence)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주목표였다. (튜링테스트 대표적인 예)
    언어 지능을 제외한 인공지능에 대한 시도들은 로보틱스와 집합적 지식을 포함한다. 사회적 계획성과 인지 성의 능력은 떨어지지만 유사한 유인원을 포함한, 복잡한 인식 방법을 가진 동물뿐만 아니라 특히 곤충들(로봇들로 모방하기 쉬운)까지 포함한 동물학으로부터 인공지능 과학은 시작된다. 환경에 대한 처리, 의사 결정을 일치시키는 것에 중심을 두며 어떻게 지능적 행동이 구성되는 것인가를 찾을 때, 생물학과, 정치과학으로부터 끌어낸다.
    여러 가지 생명체들의 모든 논리구조를 가져온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기계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공지능 학자는 동물들은 인간들보다 모방하기 쉽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물의 지능을 만족하는 계산 모델은 없다. 매컬러스가 쓴 신경 행동에서 내재적 사고의 논리적 계산, 튜링의 기계와 지능의 계산 그리고 리클라이너의 인간과 컴퓨터의 공생과 기계 지능의 개념에 관한 독창적인 논문들이다.
    존 루커스의 지성, 기계, 괴델과 같은 논리학과 철학 기반의 기계지능의 가능성을 부인한 초기 논문들도 있다. (E.T. Jayne에 따르면) 존 폰 노이만은 이미 이를 예측하였는데, 1948년에 기계가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강의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기계가 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당신이 그 기계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준다면, 나는 언제든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 했다. 폰 노이만은 이미 그 전에 모든 처리 절차(procedure)는 (범용) 컴퓨터에 의해서 시뮬레이션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함에 따라 처치-튜링 이론을 언급했다. 인공지능 연구에 바탕을 둔 실질적인 작업이 결실을 거둠에 따라, 인공지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위해 인공지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예전에는 '지능적'인 일이라고 주장하던 컴퓨터 체스나 바둑, 음성인식 등과 같은 작업에 대해 말을 바꾸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이처럼 연구 목표를 옮기는 작업은 '지능'을 '인간은 할 수 있지만, 기계는 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정의하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하였다.
    -인공지능의 탄생-
    1943~1956년대에 이르러서 학, 철학, 공학, 경제 등 다양한 영역의 과학자들에게서 인공적인 두뇌의 가능성이 논의되었다. 1956년에 이르러서, 인공지능이 학문 분야로 들어섰다.
    인공 두뇌학과 초기 신경 네트워크-
    생각하는 기계에 대한 초기 연구는 30년대 후기에서부터 50년대 초기의 유행한 아이디어에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전기적인 네트워크라고 보았다. 당시 신경학의 최신 연구는 실제 뇌가 뉴런으로 이루어진 위너가 인공 두뇌학을 전기적 네트워크의 제어와 안정화로 묘사했으며, 섀넌의 정보 과학은 디지털 신호로 묘사했다. 또 튜링의 계산 이론은 어떤 형태의 계산도 디지털로 나타낼 수 있음을 보였다. 이런 여러 밀접한 연관에서, 인공두뇌의 전자적 구축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월터의 거북이 로봇이 이 아이디어를 중요하게 포함한 연구의 예이다. 이 기계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아날로그 회로를 이용했지만, 디지털의 전자적, 상징적 추리를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월터 피츠(Walter Pitts)와 워런 매 컬러(Warren Sturgis McCulloch)는 인공 신경망에 기인한 네트워크를 분석하고 그들이 어떻게 간단한 논리적 기능을 하는지 보여주었다. 그들은 후에 신경 네트워크라 부르는 기술을 첫 번째로 연구한 사람이다. 피츠와 매컬러스는 24살의 대학원생인 젊은 마빈 민스키를 만났고, 민스키는 1951년 첫 번째 신경 네트워크 기계인 SNARC를 구축했다. 민스키는 향후 50년 동안 인공지능의 가장 중요한 지도적, 혁신적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튜링 테스트-튜링 테스트는 인공 지능에 대한 최초의 깊이 있는 철학적 제안이다.
    1950년 앨런 튜링은 생각하는 기계의 구현 가능성에 대한 분석이 담긴, 인공지능 역사에서 혁혁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생각"을 정의하기 어려움에 주목해, 그 유명한 튜링테스트를 고안했다. 텔레프린터를 통한 대화에서 기계가 사람인지 기계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대화를 잘 이끌어 간다면, 이것은 기계가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었다.
    게임 인공지능-게임 인공지능은 역사 속에서 인공 지능의 발전 척도로 계속 사용될 것이다. 1951년에, 맨체스터 대학의 패란 티 마크 1(Ferranti Mark 1) 기계를 사용하여 크리스토퍼 스프레이(Christopher Strachey)는 체커 프로그램을 작성했고, 디트리히 프란츠(Dietrich Prinz)는 체스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아서 새뮤얼(Arthur Samuel)이 50년대 중반과 60년대 초반에 개발한 체커 프로그램은 결국 존경받는 아마추어에게 도전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적 발전을 이룩했다. 상징 추론과 논리 이론은 디지털 컴퓨터에 접할 수 있는 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몇몇 과학자들은 직관적으로 기계가 수를 다루듯 기호를 다루고, 사람처럼 기호의 본질적인 부분'까지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프로그램은 결국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에 나오는 52개의 정리 중 32개를 증명해냈고, 일부 새롭고 더 우아한 증거를 찾아내기도 했다.
    -다트머스 콘퍼런스 1956년:AI 탄생-
    1956년에 열린 다트머스 콘퍼런스는 마빈 민스키와 존 매카시, 그리고 IBM의 수석 과학자인 클로드 섀넌과 네이선 로체스터(Nathan Rochester)가 개최했다. 콘퍼런스는 "학습의 모든 면 또는 지능의 다른 모든 특성으로 기계를 정밀하게 기술할 수 있고 이를 시물레이션 할 수 있다"라는 주장을 포함하여 제안을 제기했다. 참가자는 레이 솔로모노프(Ray Solomon off), 올리버 셀프이지(Oliver Selfridge), 트렌처들 모어(Trenchard More), 아서 새뮤얼(Arthur Smuel), 앨런 뉴럴(Allen Newell)과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으로, 그들 모두 수십 년 동안 인공지능 연구에서 중요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콘퍼런스에서 뉴럴과 사이먼은 "논리 이론"을 소개했고, 매카시는 Artificial Intelligence를 그들의 연구를 칭하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길 설득했다. 1956년 다트머스 콘퍼런스는 AI라는 이름, 목표 지점, 첫 번째 성공과 이를 이룬 사람들, 그리고 넓은 의미의 AI 탄생을 포함하는 순간이었다.
    -황금기(1956~1974년)-
    다트머스 콘퍼런스 이후에, AI라는 새로운 영역은 발전의 땅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은 대수학 문제를 풀었고 기하학의 정리를 증명했으며 영어를 학습했다. 몇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기계의 "지능적" 행동을 보고 AI로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연구가들은 개인의 의견 또는 출판물들을 통해 낙관론을 펼쳤고, 완전한 지능을 갖춘 기계가 20년 안에 탄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30] ARPA(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같은 정부 기관은 이 새로운 분야에 돈을 쏟아부었다.
    (탐색 추리,자연어처리,마이크로월드,낙관론,자금)
    자금-1963년 6월, MIT는 220만 달러를 고등 연구 계획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 후에 DARPA로 알려짐)에 받았다. 자금은 민스키와 매카시가 5년 전 설립한 "AI 그룹"이 포섭한 프로젝트 MAC에서 사용되었다. DARPA는 계속해서 매년 300만 달러를 70년대까지 제공했다. DARPA는 또한 유사한 자금을 뉴럴과 사이먼의 CMU 프로그램과 스탠퍼드 AI 프로젝트에 제공했다. 또 다른 중요한 AI 연구소는 1965년 도널드 미치(Donald Michie)기 에든버러 대학교에 세웠다. 이 4개의 시설은 계속해서 많은 연도에 걸쳐 학계의 주요한 AI 연구소, 그리고 자금처로 존재할 것이다. 자금은 몇 가지 단서와 함께 제공됐다 : ARPA의 기획자 리 틀렸다(J. C. R. Licklider)는 그의 조직은 "프로젝트가 아니라,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고 믿었고, 연구자들이 어떤 방향이든 그들의 관심 있는 쪽을 연구하도록 허용했다. 이것은 MIT에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생성했고 해킹 문화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손을 떼고 지켜보는 형식의 지원은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반응형

    '정보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AI 암흑기와 실용적인 기술응용  (0) 2022.11.02
    인공지능  (0) 2022.11.02
    컴퓨터 과학  (0) 2022.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