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0. 29.

    by. 멀티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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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쑨원의 혁명 운동

    쑨원(1900년 8월)
    중국 공화 혁명의 시초는 1894년 쑨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청조를 타도하자!’는 취지로 미주 하와이에서 ‘흥중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쑨원은 다음해 1895년 홍콩에서도 흥중회를 만들어 기층 민중을 동원해 광저우를 무장으로써 점령하려는 최초 반청 봉기를 계획했으나 이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후 망명했고 영국 런던에서 청국 공사관에 억류되었다.[주해 9] 쑨원은 이 사건으로 국제상으로 저명해졌고 억류에서 석방된 후에는 대영박물관에 드나들면서 삼민주의 사상 기초를 닦았고 1897년 전후로 쑨원은 일본을 거점으로 하와이,베트남, 타이, 싱가포르를 순회하면서 화교와 유학생들에게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봉기하려는 자금 모금에 나선다.[11]

    1900년 의화단운동을 전후해 쑨원은 이홍장을 황제로 추대해 양광지방을 독립시키려는 모의하다가 실패했다. 이어 광둥성 혜주에서 조직한 봉기도 한때 2만 여 인이나 모을 수 있었으나 외부 지원 두절로 실패했고 다시 망명했다. 이렇게 쑨원이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한도를 정한 봉기를 도모하던 중에 일어난 의화단운동은 청조 존재 근거에 의문을 불러일으켰고 일본 유학생을 위시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혁명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11]


    1905년 화흥회 요인들. 앞줄 왼쪽 첫 번째가 황싱,네번째가 쑹자오런, 뒷줄 오른쪽 끝이 류보.
    대러시아 저항운동은 사회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학생과 지식인에게 ‘청조 타도 정당성’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의화단 진압 후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청조에 새로운 요구 조건을 제시해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권하에 두려고 했다.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중국인 유학생들은 러시아에 저항하려는 의용대를 결성하고 학생군을 조직했다. 이들은 많은 유학생에게 호응받았으나 청조는 “대러시아 저항을 구실로 혁명을 꾀한다”고 하여 탄압했다.[11]

    이 저항운동이 청조 탄압 탓에 실패한 후 일본 유학생계에는 혁명 운동 기운이 본격으로 싹텄다. 이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조직한 단체가 모태가 되어 국내 반청 혁명단체인 화흥회[주해 10]와 광복회[주해 11] 가 뒤에 성립되었으며, 종래 반제국주의의 선전이 반청 혁명을 집중으로 선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는 추용의 ‘혁명군’같은 선전책자가 널리 읽혀 급진적인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1] 장병린이 ‘혁명군’[주해 12]을 소개하는 글을 ‘소보’(蘇報)라는 잡지에 실었다가 추용과 함께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는 필화사건으로 이 책자는 한층 널리 알려졌다. 또 화흥회 회원인 진천화[주해 13] 가 지은 ‘경세종’, ‘맹회두’와 같은 선전책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정부가 중국인 유학생을 단속하는 규칙을 만든 데 항의해 진천화가 바다에 투신해 죽은 사건은 그의 혁명주장을 더욱 인상 깊게 했다. 이들의 주장은 청조가 대외적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중국이 멸망할 위기에 놓여있으므로 청조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1]

    중국동맹회 결성
    중국동맹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국동맹회 기관지 《민보》. 1906년 발행되었다.
    각지에서 혁명 단체가 결성되자 쑨원의 흥중회를 비롯하여 화흥회, 광복회 등 여러 혁명단체들이 “통합하여 혁명운동을 더욱 강화하자”는 움직임을 나타냈다. 1907년 7월 혁명의 선구자 쑨원이 유럽에서 일본에 들렀을 때 이 움직임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12] 쑨원은 혁명의 동지 황싱과 혁명 제단체의 연합을 제창한 끝에 호응을 얻었다. 대표들은 쑨원을 주석으로 추대할 것, 새로 결성되는 단체의 이름은 중국동맹회로 할 것, 쑨원이 제창하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창립하여 지권을 평균한다’는 4개 강령을 동맹회의 강령으로 결정하였다. 이 혁명파의 지도적 인물로는 쑨원, 황싱, 장병린 등이 있었다. 그들은 1906년 공동으로 전략을 세워 혁명 봉기 후의 정권 수립에 대비한다는 데 합의하였다.[12]

    동맹회 지부 설치
    중국동맹회는 본부를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두고 국내외에 8개 지부를 두도록 했다. 국내에 5부 즉 상하이에 설치한 동부는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 3개 성을 관할하며, 충칭에 설치한 서부는 간쑤성, 쓰촨성, 티베트, 신장, 구이저우성 5개 성을 관할하고, 홍콩에 설치한 남부는 푸젠성, 광둥성, 광시, 윈난성 4개 성을 관할하고, 연대에 설치한 북부는 산둥성, 산시 성(산서성), 산시 성(섬서성), 몽골, 즈리 성, 동삼성의 8성을 관할하도록 하였다.[13]

    한편 해외에는 미국 호놀룰루에 설치한 하와이 지부, 샌프란시스코에 설치한 미주 지부, 유럽 벨기에의 브뤼셀에는 구주 지부, 싱가포르에는 남양 지부 등 4개 지부를 설치했다.[13]

    혁명 참가자의 구성원
    신해혁명은 일본에서 귀국한 유학생,지식인 뿐만 아닌 여러 단체에 참가한 일반 군중들, 해외 화교, 신군 병사, 신사층, 농민 등 폭넓은 계층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이었다.[14]

    신흥지식인 참여
    신흥 지식인들은 해외(주로 일본)에서 신지식을 배운 유학생과 신식 학당(學堂)에서 배운 학생이 주체였다. 과거제도 폐지 후, 청조는 서구식 교육을 도입 함과 동시에 해외 유학을 장려했다. 타오청장의 제창 아래, 서석린을 비롯해 많은 유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해 최신의 군사 교육을 받아 귀국했다.[14]

    1900년대, 청조에서는 일본 유학열이 높아져, 신해혁명 직전에는 수만명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배우는 유학생의 주변에는 혁명 사상에 고취되었는데, 1905년 중국 동맹회가 도쿄에서 성립했을 때 90%이상의 회원이 일본에서 배우는 유학생들이었다. 일본 유학한 학생들은 신해혁명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는데, 지도자 쑨원을 비롯해 황싱, 쑹자오런, 후한민, 왕징웨이등 혁명 지도자들 대부분이 일본 망명객 내지는 유학의 경험자였다.[14]

    비밀결사 참가자 참여
    청조 말기, 각지에서 홍문회(洪門会), 가로회(哥老会), 치공당(致公堂), 삼합회(三合会), 홍강회(洪江会) 등의 비밀결사 단체가 결성되어 반청(反淸)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밀결사에는 신사층,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사상을 제창했다.[14]

    비밀결사에서 가로회는 화흥회를, 청방(青幇)은 광복회를, 삼합회는 흥중회와 각각 친밀한 관계를 구축했는데 쑨원도 이전에는 홍문치공당(洪門致公堂)의 회원이었다. 1908년 이전, 혁명파 인사들은 이러한 비밀결사 단체 세력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고, 이러한 배경 아래 무장 봉기의 준비를 진행시켜 청조 타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해외 화교의 참여
    해외 화교도 신해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해외 화교는 해외 각지의 거주지에서 동맹회에 대한 자금 원조를 지원해준 것과 동시에, 귀국후 출신지에서 혁명 단체를 조직, 많은 무장 봉기에 참가했다. 1894년 11월,쑨원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중회를 결성했을 때에는 20명의 화교가 참여했었다. 또한, 황화강 봉기 당시 죽은 '72명의 열사'가운데 해외 화교가 29명을 차지하는 등, 많은 화교들이 혁명활동에 참가했다.[14]

    신군 참여
    1908년 이후, 혁명파의 혁명 운동은 군대 내의 신군(신건육군)의 혁명활동 동조자 포섭에 중점으로 옮겨, 혁명파 인사들은 신군 내에서 비밀리에 혁명 사상 보급에 노력했다. 과거제도의 폐지와 청조의 군대개혁 등에 의해 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당시 신군에 많이 있어 이들이 혁명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이끌어 낸다.[14]

    신사층의 참여
    1907년 9월부터 10월, 청조는 입헌운동을 추진하고자 자정원과 자의국을 설치하여 신사층의 참정권을 제공했다. 1909년, 각 성(省)에 자의국이 설치되어 많은 신사층들이 선거에 의해 자의국에 선출되었다. 지방 신사층의 정치력은 지방정치 내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했다.[14]

    이러한 신사층들은 본래는 입헌파를 지지했으나 청조는 입헌 운동에 소극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1911년 5월에 경친왕을 필두로 발족한 내각 정책에 신사층은 대실망했고 우창봉기 이후 신사층을 비롯한 입헌파 세력도 신해혁명에 참여하였다.[14]

    외국인 참여
    이밖에 신해혁명에는 중국 동맹회를 비롯한 혁명활동에 가담한 중국인 이외 참여한 외국인들도 적지 않게 존재했었는데 특히 우메야 쇼키치(梅屋庄吉), 미야자키 도텐 등의 일본인들 지원이 현저하게 많았다.[15]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성립된 중국동맹회를 비롯한 많은 혁명단체가 일본에서 조직 운영되었는데, 여기서 기타 잇키를 비롯한 일본 지식인들 다수가 동맹회에 참여하였고 이들은 뒷날 1911년 우창 봉기,신해혁명에도 참가한다.[16]

    그 밖에 한국인으로는 신규식이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할 때 동맹회 기관지 《민립보(民立報)》[주해 14] 기자 서혈아(徐血兒)를 만나 서혈아의 소개로 천치메이와 황싱 등 중국동맹회 간부들과 접선하고 친교를 맺어 1911년 3월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이후 신규식은 10월 우창봉기에 가담, 신해혁명에 참여했다.[17][18]

    혁명 봉기의 계속과 실패
    중국동맹회 § 신해혁명 이전 활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동맹회 활동
    중국동맹회는 같은 처지로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세력인 캉유웨이의 입헌파와 사상적인 논쟁을 전개하면서도 혁명운동의 구심체로서 조직적이고 계통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동맹회의 활동은 입헌파에 비해 훨씬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혁명 활동이란 비밀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중국 국내에는 동맹회 세력의 본부를 설치할 곳이 없었다.[19]

    한편, 동맹회의 혁명이란 무력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므로 무력 또한 물질적인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혁명당은 각지의 회당과 군대에게 연락하여 이들과 함께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19] 쑨원의 전략은 해외에서 혁명 이론으로 무장한 혁명 세력을 본토에 침투시켜 전국 규모의 봉기를 유도한다는 것이었다.[20] 그는 삼민주의를 내세워 군법,약법,헌법의 순서로 혁명을 전개한다는 3단계 혁명방안을 구상했다. 쑨원의 동맹회는 선전활동 외에 반청 무장봉기를 1905년~1911년 우창봉기 이전까지 수십여차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19] 그 가운데 1908년 10월에 일으킨 ‘안휘성 신군 봉기’와 1910년 2월에 일으킨 ‘경술 신군 봉기’, 그리고 1911년 4월에 일으킨 황화강 봉기등이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러한 무장봉기 실패들은 동맹회에 커다란 타격을 받기도 했다.[21]

    동맹회를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는 계속 실패해왔으나 국내에서의 혁명적 정세는 계속 확산되어가고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21]

    주요사건
    안휘 신군 봉기
    1908년 10월 안휘 성에서 ‘신군 사건’(新軍事件)이 발생했는데, 이를 ‘안휘 신군 봉기’라고 부른다.[22] 신군은 위안스카이가 새로 편성한 신식 육군으로 신군의 청년 장병 가운데에는 쑨원의 혁명 사상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악왕회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한족 국가 건설의 결의를 다졌다. 1908년 10월 23일 악왕회의 간부인 범전갑은 광서제와 서태후의 죽음 소식을 듣고 10월 26일을 기하여 봉기하기로 하고 각 진영의 간부와 연락하여 웅성기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22] 이렇게 해서 성 밖에 있던 신군은 일제히 봉기하였으나 탄약의 부족과 성 안의 군대가 내응하지 않고 해군 또한 봉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주동자였던 범전갑은 체포, 처형되고 웅성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그 후 웅성기는 다시 청나라에 잠입하여 유럽에서 귀국하는 섭정왕의 두 동생 재도(載濤)와 재순(載洵)을 하얼빈 역에서 암살하려다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22]

    경술 신군 봉기
    1910년 2월, 광둥 성의 신군이 구정을 기해 일제히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 신군 봉기는 주로 혁명파가 신군의 간부를 설득하여 봉기를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번 광둥의 경우는 혁명파의 청년들이 신군 가운데 잠입하여 봉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혁명파 청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노련한 감시자의 눈에 띄기가 쉬웠다.[22] 봉기 계획을 알아차린 신군의 수뇌들은 무기고에 있던 탄약을 모두 감추어 버렸다.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던 신군의 보병 200여명이 무기고로 달려갔으나 탄약은 하나도 없었다. 봉기는 결국 실패했다. 이번 봉기에는 왕조명이나 호한민이 홍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담할 예정이었으나 탄약을 구하지 못해 신군이 해산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경술 신군 봉기’라고 부른다. 봉기의 주동자 예영전은 전사하고 신군 34표(標, 1표는 200명 단위)의 책임자 조성(趙聲)은 어렵게 탈출하였다.[22]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
    혁명 봉기가 실패를 거듭하자 입헌파의 기관지 《신민총보》[주해 15]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까지도 ‘혁명파의 수령들은 편안히 앉아 있기만 하고 애매한 대중만 죽음에 몰아넣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주해 16][22]

    동맹회 기관지 《민보》의 격렬한 비난에 분통을 터뜨린 왕조명은 《민보》의 보도가 잘못이라는 실증을 보여주기 위하여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혁명 투사들뿐 아니라 자신도 혁명을 위하여는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베이징에 올라온 왕조명은 웅성기가 하얼빈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한 바 있는 두 황족을 베이징 도착 때 폭살할 계획을 세웠다.[22] 그러나 두 황족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출영 인파로 그들을 분별할 길이 없어 예정을 변경하였다. 왕조명은 섭정왕인 순친왕을 폭살할 계획으로 순친왕이 자주 통과하는 다리 밑에 폭탄을 장치하였으나 이것마저 사전에 통행인에게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수색 끝에 폭탄 표피를 만든 대장간이 적발됨으로써 왕조명도 체포되어 무기형에 처해졌다. 왕조명의 순친왕 암살 기도 사건은 1910년 4월의 일이었다.[22]

    황화강 사건
    황화강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10월 쑨원과 황싱, 조성(趙聲) 등 중국동맹회 지도층 간부들이 남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자금을 모집해 동맹회원 500인으로 결사대를 조직하고 신군(新軍)을 주체로 반청 단체들과 연합해 광저우에서 재차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봉기에 성공하면 광저우를 근거지로 삼고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북벌하되, 한 갈래는 황싱이 거느리고 호남을 거쳐 우창을 점령하며, 다른 한 갈래는 조성이 거느리고 강서를 거쳐 난징을 점령하기로 했다. 그런 다음 두 군이 회합해 양자 강을 건너 곧장 베이징으로 향하기로 했다.[23]

    그 해 1910년 10월 황싱, 조성은 홍콩에 봉기조직부를 설립하고 광저우로 사람을 보내 비밀 연락 지점을 38곳이나 세웠다. 이듬해 1911년 3월 5일 황싱과 조성은 봉기 날짜를 3월 15일로 의결했다가 다시 28일로 고쳤다. 황싱과 조성은 광저우에 도착하자 봉기 총지휘부를 설립했는데 무기가 미처 도착하지 않아 봉기를 하루 연기해 29일(4월 27일)에 일으키기로 하고 원래 정해놓은 열 갈래를 네 갈래로 통합하고 각각 광저우의 총독부와 북문,순경교련소,남대문 등을 공략하기로 했다.[23]


    황화강 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힌 72열사들의 묘.
    3월 29일 오후 5시 반에 황싱이 100여 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는데, 나머지 세 갈래 봉기군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사하지 못하고 신군도 성 밖에 막혀 들어오지 못했다. 황싱은 자신이 이끄는 100여명을 거느리고 계획대로 총독부를 점령했으나 신임 총독 장명기가 이미 도주해 총독부에 불을 지르고 나오다 수사제독(水師提督) 이준(李準)의 친병대대에 맞서 시가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대오를 흐트러뜨리고 말았다. 황싱은 이 전투에서 오른쪽 손가락을 두 마디나 잘렸으나 완강히 싸우다 후에 그의 처가 된 서종한의 권고에 못 이겨 의복을 갈아입고 그녀의 호위 아래 홍콩으로 몸을 숨겼다.[23]

    이 봉기도 실패해 봉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붙잡혀 살해된 사람까지 모두 86명이었다. 4일 후 유지인사들이 나서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를 72구 찾아 황화강(黃花岡)이라는 곳에 집단 안장했는데, 이를 황화강 72열사라고 부른다.[23]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활동

    1911년 12월 16일, 쑨원과 그의 군사 고문 호머 리 (Homer Lea, 荷馬李)는 싱가포르의 골든벨 맨션 (Goldenbell Mansion)에 머물렀다. 이 기간은 쑨원이 우창봉기 소식을 듣고 미국->유럽을 경유해 싱가포르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기간이다.
    말레이 반도에서의 혁명 활동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이루어진 신해혁명과 관련된 활동을 가리키는데, 쑨원은 1906년부터 1910년 기간동안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해외에서의 자금을 얻기 위한 활동과 혁명사상 전파 활동을 하였다. 이 무렵 말레이 반도는 중국 본토를 제외하면 화교의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으며, 화교의 경제적 위치도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쑨원은 수차에 걸쳐 말레이 반도를 방문해 현지의 화교들에게 혁명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고 화교 다수에게서 조언을 얻는 등 화교들에게 혁명을 호응받았으므로 말레이 반도는 혁명 운동의 주요 활동 지역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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