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0. 29.

    by. 멀티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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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제도 개혁

    북양신군 훈련.

    산둥성 순무 시절 위안스카이. 의화단 운동 이후 급부상해 실권자로 대두했다.
    청조에서 주도한 교육개혁은 여러 가지 한계점이 보였는데 군사제도 개혁에서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제1차와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시작해 청불 전쟁, 청일 전쟁, 의화단 운동 등 전쟁마다 패배를 거듭해 온 청은 신식 군대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군사 개혁에 착수했다. 의화단운동 이후 주력 군대는 무위우군만 남고 나머지는 해산되었다. 의화단운동을 계기로 급부상하고 출세 지향 일로를 달리던 위안스카이가 직례총독이 되어 무위우군을 이끌고 톈진에 주둔하였다.[8] 청조도 기존 군대의 부패와 무능을 알고 1901년 8월에 무과의 과거제를 폐지하고 각 성에 명령하여 북양(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 新建陸軍)과 양강(장지동의 자강군)을 모방해 무비학당(武備學堂)을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기존 군대를 해산시키고 상비군을 새로 편성 훈련하도록 지시하였다.[8]

    1901년 위안스카이가 주축이 되어 서양식 군대인 ‘신건육군, 약칭 '신군'이 36개 사단으로 재조직되었다. 특히 ‘자희신정’의 결과로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인 위안스카이를 영수로 하는 북양 군벌이 급성장해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1905년에 북양 군벌은 병력 약 7만, 사단 6개 규모로 구성된 북양 신군을 보유하였다. 이중 사단 4개는 즈리 성, 나머지 사단 2개는 만주와 산둥성에 배치됐으며, 군사권 실질 권한자로 급부상한 위안스카이[주해 6]는 교통은행을 설립하고 영국의 지지하에 철도 운수 부문 실권도 장악했다.[9]

    기존 청조는 사농공상 신분 차별에 문관을 숭상하고 무관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으나 잇단 전쟁 패배와 군대 필요성이 절박지자 군사 개혁을 서둘러 착수했다. 청조가 ‘신군’(신건육군)을 조직하고 군사제도 개혁을 착수한 결과, 군의 위상이 과거와 크게 달라져 무관의 위상이 문관과 동등해질 정도로 높아졌으며 일본에 파견된 군관들은 중국인 유학생 사이에 널리 퍼진 혁명 사상에 영향받아 후일 ‘공화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7]

    입헌군주제 추진
    신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청조를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로 국가 부흥을 꾀하자는 입헌 운동도 전개됐다. 특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사태를 계기로 “아시아인도 입헌하면 유럽을 이길 수 있다”는 양계초의 주장이 널리 호응을 얻었다. 실업 진흥 기치하에 민족자본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 발전하기는 했으나 외국 자본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해서 신흥 자본가 계층은 입헌 개혁을 지지했다. 입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퍼져가는 가운데 대세를 관망하던 위안스카이는 1905년에 황족과 귀족을 국외에 파견해 정치를 시찰시키면서 입헌하려는 준비해야 한다고 황실에 상주했다. 서태후의 측근 대신들도 “입헌해야 군권(君權)이 영구히 굳건해진다”고 서태후를 설득했다.[10]

    청 조정은 1905년 7월 헌정시찰단을 유럽, 미국, 일본에 파견했고 1906년에는 9년 뒤에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는 ‘상유(上諭)’를 선포했으며, 1908년 8월에는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을 공포하여 9년 후에 헌정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10]

    이 《흠정헌법대강》은 일본 제국의 메이지 헌법을 모형으로 하여 황제의 만세일계(萬世一係)와 신성불가침, 황제의 광범위하고 강대한 권한을 규정했으나 입헌군주제를 추진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1908년 11월 14일에 청 제11대 황제 광서제가 죽었다. 서태후는 당일로 광서제 조카로 나이가 3살밖에 안 된 푸이를 황제로 선포하고 그의 생부인 순친왕 재풍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 다음날인 11월 15일 서태후도 급사했다.[10]

    푸이가 즉위하니 그가 청 최후 황제인 선통제다. 섭정인 순친왕은 1909년 1월 위안스카이를 해임했다.[주해 7] 선통제가 즉위한 후 입헌파는 국회를 조기에 개설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를 계기로 청조를 타도하려는 혁명파의 입지가 강화하였다.[10]

    당시 중국 내 상황
    청조가 추진한 교육개혁으로 신식 학교가 설립되고 유학생이 대거 파견된 결과로 전통 독서인과 유형이 다른 지식 계층이 탄생했다. 1908년에는 전국에 학교 47,000여 개가 있었고 학생은 약 130만 인, 교원은 약 63,500여 인에 달했다. 이들 새로운 지식 계층은 차츰 혁명 사상과 입헌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특히 일본으로 유학을 간 중국인 유학생들은 급속하게 입헌 사상과 혁명 사상을 수용했다.[10]

    일변 중국 내 경제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청 조정은 1900년에 있었던 의화단운동으로 말미암아 서양 열강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주해 8]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신정’ 실행에도 많은 재원이 필요하여 각종 세금이 새로 생겨나 민중 고통이 상당히 심해졌다. 농민 봉기가 1906년에 199회, 1907년에 188회, 1909년에 112회, 1910년에 266회나 일어날 정도로 만연했고 1911년 이후에는 더욱 급속히 증가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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