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1. 8.

    by. 멀티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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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툴롱 포위전=
    루이 16세의 처형을 계기로 1793년에 대불 동맹 전쟁이 발발했다. 유럽의 군주들은 국왕이 없어도 국가통치가 가능하다는 '불온한' 혁명사상인 민주주의 사상이 자국민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랑스 혁명정부를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했다. 이에 발맞추듯 왕당파가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혁명정부는 내우외환에 위기에 처한다. 프랑스 해군의 주요 기지가 있는 툴롱을 장악한 왕당파는 반란 진압에 나선 혁명정부의 진압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8월 27일에 대불 동맹인 영국과 스페인 해군을 끌어들여 혁명정부를 위협했다. 사령관이 두 차례나 바뀌면서 지루한 공방전만 3개월간 이어지다가 12월이 되어서야 나폴레옹의 작전에 대한 승인이 떨어졌다. 48시간 동안 포격을 퍼붓고 나서 이어진 백병전 끝에 프랑스 군이 12월 18일 새벽에 레기에트와 발라디에 요새를 탈환하자 영국과 스페인 군은 황급히 철수하였다. 두 곳의 요새는 툴롱 내항과 외항을 차단하는 위치에 있었고, 외부로부터 보급을 끊고 내항에 있는 적을 고립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나폴레옹은 백병전 중에 허벅지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군인으로서 최초로 무훈을 세웠다. 툴롱 포위전 승리의 공적을 인정받은 그는 중령을 거쳐 준장으로 진급하여 24세에 장군이 되었다. 이는 3개월 만에 이루어진 고속 진급으로, 당시는 혁명을 반대한 귀족 출신 장교들의 집단망명으로 유능한 지휘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툴롱항은 프랑스 해군의 중요 해군기지이며 지중해를 통제하는 데 핵심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에 혁명정부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1793년 9월, 정부군이 툴롱 탈환을 위해 투입되었으나 무능한 장군들로 인해 고전하였다. 대위 시절 포병대 지휘관으로 참전한 나폴레옹이 전략상 최고의 요지이자 전투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레기에트와 발라디에 요새 점령 작전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관 이래 나폴레옹은 4년간 내륙지역에서만 근무했기 때문에 항구와 해안지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고향 코르시카에서 4년간 활동하며 항구 주변과 요새를 면밀히 연구했고, 이에 대한 보고서를 국민공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운도 따랐다. 고향 아작시오와 툴롱의 지형이 놀랍도록 유사했다. 포병장교의 관점에서 주요 전략 요충지에 대한 파악, 상륙전이나 방어전에서 중요한 지형에 포병대 배치와 이용에 대한 관심과 노력의 경험은 툴롱항 포위전에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했다.


    -왕당파 폭동 진압-
    무능한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집권한 자코뱅파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자코뱅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로베스피에르는 혼란한 국내외 시국 해결과 혁명 성과 보호를 구실 삼아 반혁명 세력을 비롯하여 온건파와 반대파를 단두대로 보내며 독재를 통해 혁명정부를 이끌었다. 이에 따라 1년여 동안 파리에서만 30만명이 체포되고 약 15,000명이 처형당했다. 《프레리일 22일 법》을 제정하여 공포정치를 강화하자 그 가혹함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들이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의 반동 사건을 일으켜 로베스피에르 일당을 처형하였다.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인 오귀스탱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와 몇몇 모함을 받아 8월에 투옥되었다. 1795년 10월 5일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집권한 테르미도르파가 《3분의 2범》을 의결하자 의원선거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된 왕당파가 무장 봉기했는데, 바라스 백작의 요청으로 폭동진압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무장한 2만명의 폭도를 향해 산탄이 장전된 대포를 쏘는 전법으로[53] 신속하게 폭동을 진압하였다. 이 일로 총재정부에 인정받게 되어 정보부와 파리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 원정-
    1796년, 바라스에 의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이 이탈리아 원정을 20년 동안 펼쳐진 나폴레옹 전쟁의 서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때 나폴레옹의 나이는 27세였다. 이에 1796년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은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는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혁명파와 반혁명파 간의 이념 대립 등의 혼란 상태가 지속되어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과 싸우기 위해 눈보라가 몰아치는 알프스산맥을 넘으려 하였다. 몇 달에 걸쳐 산맥을 돌아서 넘은 그는 곧바로 이탈리아를 제압한 후,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군사적인 업적으로 나폴레옹의 인기는 프랑스 내에서 높아져 갔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제 성냥을 쓰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굴복하고 캄포 푸르지오 조약을 체결하여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북부 지방인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이집트 원정-
    혁명 정부(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에게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한다는 것이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비문 해석은 1822년에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완벽하게 해석되었다. 이 비석은 영국군에 의해 1802년에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어있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스핑크스 앞에선 나폴레옹

    -브뤼메르 쿠데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가는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했다. 8월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만에서 호라시고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하고 프랑스 지중해 함대 주력이 전멸한다. 이 승리로 영국 해군이 해당 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프랑스 해군 전열함들이 전멸당하고 두 척만 남게 되어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고립되고 만다. 한편 프랑스가 대불 동맹군에게 연패하며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클레베르송 장군에게 원정군을 맡기고,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나폴레옹의 행위는 탈영에 해당하였으나 당시 총재정부는 이를 처벌할 힘이 없었고, 정국은 극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혁명정부의 권력자 시에예스와 함께 쿠데타를 공모한 후, 동생인 오백인회 의장 루시 양과 탈레랑의 도움으로 1799년 11월 9일 의사당에서 자신의 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하였다. 오백인회가 이를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오백인회를 해산시킨 후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대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1800년 2월 7일에 국민 투표에 부쳤다... 물론 재산제한선 거에 유권자 수  700만명 중 다수가 기권하였고 비밀투표가 아니었으며 투표 결과는 내무장관이었던 루시 양에 의해 조작된 결과였다. 찬성 300만 표, 반대 1,567표가 나와 통과되었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 대통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로써 불과 30세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통령 정부는 3명의 대통령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제2 대통령과 제3 대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 대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있었다.
     
     
    "데스페라도 보나파르트"
    다음에도 나폴레옹의 통령시절을 포스팅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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