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1. 8.

    by. 멀티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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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불동맹 전쟁-
    제1통령이 된 후에 나폴레옹은 대불동맹국에 강화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원정대를 이끌고 해발 2.469m에 달하는 알프스의 산베르나르 고개(Great St Bernard pass)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부관들은 나폴레옹의 계획을 극구 만류했다. 과거 한니발이 산베르나르 고개를 넘은 이후에는 대규모 군사가 이 고개를 넘어간 역사가 없었으며 너무 험준한 협곡이라 군대가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말하며 밀어 부쳤다.1800년 5월에 프랑스 원정대는 험준한 산베르나르 고개를 넘었다.그리고 같은해 6월에 오스트리아 군대와 맞붙은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제시한 강화 조건을 수용하여 라인 강의 절반을 프랑스측에 할양하였으며, 북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양도했다. 이 강화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고 영국만이 전쟁을 지속하였다. 


    -개혁 작업-
    나폴레옹은 내정 면에서도 일대 개혁을 실시했다.전국적으로 세금 제도와 행정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혁명기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공업 생산력의 회복을 실시하여 산업 전반의 부흥에 힘을 쏟았다.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1802년에는 유명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창설했다.또, 교육 개혁에도 힘써 공공 교육법을 제정하였다. 또 국내 법 정비에도 임하여 1804년에는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다.


    -대미관계 개선-
    지난 수년간 프랑스는 미국과 매우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1793년에 1차 대불동맹 전쟁이 벌어진후 입장이 난처해진 미국이 영국과 제이 조약(1794년)을 체결하며 동맹국인 프랑스를 배반했기 때문이다.1778년에 미국과 프랑스간에 체결된 통상동맹조약에 따라 미국에게는 프랑스와 공동방위에 나설 의무가 있었다. 대불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를 해상봉쇄하여 프랑스의 전쟁물자 조달을 방해했다.그러나 미국은 신생 독립국으로 아직 국가의 기초가 확고하지 않았고 군사력도 약한 상태에서 유럽의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중립은 선언하였다.영국은 미국을 자극하여 미국과 프랑스간에 동맹 관계를 분쇄하기 위해서 미국 상선 수백척을 나포 해버렸다.전쟁을 원치 않았던 미국이 다소 굴욕적인 '제이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자 동맹에게 배신당한 프랑스 총재정부는 외교적인 보복을 가했다.그러나 영국으로서는 미국이 중립적 지위를 이용하여 프랑스와 교역을 할 경우 해상 봉쇄망에 빈틈이 생기는 만큼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신임 공사의 부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관계개선을 위해서 미국이 파견한 대표단에게 1778년에 체결한 조약의 폐기를 전제로 막대한 금액의 차관과 뇌물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일명 'XYZ사건'으로 비화되면서 양국은 준 전시 상황으로 치달았다. 선전포고 행위가 없는 상태에서 양국의 해군은 해상에서 산발적으로 충돌하였으며(유사전쟁), 상대국의 상선을 포획하기도 하였다.나폴레옹은 북미 루이지애나를 인수하여 새로운 프랑스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아이티 반란을 진압해야 했는데, 원정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꾀했다. 1800년에 미불 양국은 지난 1778년에 체결한 조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몰트퐁텐 조약(Treaty of Mortefontaine)을 통해 사태를 원만하게 마무리 지었다.


    -루이지애나 매각-
    나폴레옹의 본래 계획은 아이티를 점령한후 이곳을 바탕으로 하여 북미 대륙 루이지애나에 식민지 제국을 건설할 계획이었다.그러나 아이티 점령에 실패하면서 차질이 발생하였고 점차 서반구 사업에 관심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중 나폴레옹은 1803년 루이지애나를 헐값에 미국에 매각하였다. 매각대금은 전쟁비용에 보태었다.그 당시 미국은 통상물량의 1/3을 미시시피 강을 통해 수송하고 있었는데 뉴얼리언스 기항에 문제가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프랑스에 사절단을 보냈다. 루이지애나는 본래 스페인 소유였으나 1800년 산일데폰소 조약 (Treaty of San Ildefonso)을 비밀리에 맺고 프랑스가 소유권을 인수하였다. 지난 1795년에 미국은 스페인과 맺은 핑크니 조약을 통하여 미시시피 강의 운항권과 뉴올리언스 기항권을 보장받은 적이 있었다.아직 프랑스에서 정식으로 인수작업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감독중인 스페인 관리가 미국선박의 뉴올리언스 기항을 갑자기 금한 것이었다.1803년 4월, 제임스 먼로가 이끄는 미국 사절단을 접견한 나폴레옹은 골치 아프게 된 루이지애나의 매입을 제안하였다.


    -정교 협약-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 정부의 탄압을 받던 로마 가톨릭교회[95] 와의 화해도 모색한 나폴레옹은 1801년에 교황 비오 7세와 정치 및 정교협약을 맺었으며,[96] 개신교도 인정하여 국내의 종교 간 대립을 완화시켰다.[97] 프랑스 대혁명 당시 가톨릭교회는 당시 프랑스 전체 토지의 10~15%를 차지하고 있었고, 게다가 프랑스 전체 GDP의 10%를 십일조로 받아가고 있었다. 국민공회는 1790년의 성직자기본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을 제정하고 십일조를 폐지하고 교회의 자산을 몰수한데 이어 성직자들에게도 일종의 충성 서약을 하도록 강요했다.국민공회의 '반가톨릭 정책'으로 예배는 금지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쿠데타로 제1통령이 된 이후에는 부서진 교회를 약 400만파운드를 들여 재건했고 교황 비오 7세(Pius VII)와 정교협약을 맺어, 예배의 자유는 다시 확립되었고, 프랑스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보호했다.


    -종신 통령-
    왕당파와 자코뱅 파[100] 등의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국내 정치를 융화로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현 체제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탄압하였다. 


    -황제 시절-
    제정실시:1803년 8월, 나폴레옹을 반대하며 부르봉 왕정복고를 희망하던 조르주 카두달과 왕당파들이 영국과 손을 잡고 나폴레옹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프랑스의 피슈그뢰와 모로 장군 등도 이 계획에 가담하였다.그러나 1804년 초에 발각되어 카두달 등은 처형되었다.배후에 영국이 가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었고 나폴레옹은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측근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다. 암살음모 발각은 권력 항구화에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으며, 헌법상 세습 황제가 되면 부르봉 왕실에 의한 왕정복고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이에 나폴레옹은 그것을 국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선거는 비밀선거가 아니었으며, 각 선거인이 선택내용을 선거대장에 올리고 서명하는 방식이라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1804년 7월의 투표에서 찬성표 3,572,329와 반대표 2,569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제정을 수락하였다.아무튼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에 마침내 즉위식을 거행하여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프랑스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황제 대관식-
    나폴레옹은 역대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을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하였다. 나폴레옹은 교황으로부터 축성받기 위해 교황을 초대했다. 교황 비오 7세는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96] 왕관을 씌어주기 위해서 즉위식에 참석했다. 


    -파리 정비사업-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고 나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세계 제일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도시에 대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3차 대불동맹 전쟁-
    얼마 후 《아미앵 조약》은 영국 측이 파기하여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다시 전쟁 상태로 들어갔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위해 도버 해협을 접한 브로뉴에 대군을 집결시켰다. 이에 대항하여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프로이센은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영국과 오스트리아와의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중립국으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서 영국에게서 빼앗은 하노버를 프로이센에 양도한다는 약속을 했다.프랑스 육군은 10월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빈을 점령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구원하러 온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즉위 1주년인 12월 2일에 프랑스군과 격돌하여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치렀다. 나폴레옹의 교묘한 작전 덕분에 프랑스군은 완승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트 조약을 체결하여 항복을 선언했다. 이 전투는 3명의 황제가 한 전장에 모였기 때문에 ‘3황제 회전’이라고도 불린다. 나폴레옹은 이 날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두 나라를 상대로 혼자서 능히 제압한 프랑스 육군의 위광은 곧 전 유럽에 떨치게 되었다.


    -트라팔가 해전-
    1805년 10월 프랑스 해군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했다.이로써 제해권 차지에 실패하자 영국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포기했다.


    -포르투갈 침공-
    포르투갈이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 선박들의 리스본 항구 출입을 허용하자 프랑스는 1807년 11월에 포르투갈을 침공했다.침공이 시작되자 포르투갈 왕실은 귀족과 관리, 부유한 상인등 약 1만여명과 함께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브라질로 도피했다. 스페인과 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에 대한 분할통치를 협약한 나폴레옹은 앙도슈 쥐노 장군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어 포르투갈로 진군을 명했다. 프랑스 군은 손쉽게 포르투갈을 정복했으나 점령통치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포르투갈에 상륙한 영국군과 재결집한 포르투갈 군대 그리고 포르투갈 민중의 강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러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이듬해 8월에 포르투갈에서 퇴각하였으며 이후 1809년과 1810년에 포르투갈을 재차 침공하였다.


    -스페인 점령-
    1808년, 스페인에는 포르투갈 침공의 명분으로 10만명의 프랑스 군이 진주해 있었다.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스페인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스페인 지배를 노리던 나폴레옹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외국 군대가 상주하게 되자 강하게 반발하였고 1808년 3월 18일, 왕세자 페르난도를 지지하는 개혁파가 아란후에스(Aranjuez)에서 반란을 일으켰다.카를로스 4세가 3월 19일에 퇴위를 결정하였고 왕세자가 페르난도 7세가 즉위했으나 며칠뒤 카를로스 4세가 퇴위를 번복하며 나폴레옹에게 지지를 요청했다.나폴레옹은 중재를 명분삼아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모두 바요나로 오도록 유도한후 이들을 협박하여 왕권을 양도 받았다. 훗날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위찬탈은 정의롭지 못했으며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인정한 바가 있다.조아킴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 군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에서는 프랑스에 저항하는 게릴라 전이 스페인 전역에 걸쳐서 거세게 일어났으며 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영국군의 도움을 받은 스페인 게릴라들의 활동은 끓임없이 프랑스 군을 괴롭혔고 끝내 프랑스는 1813년에 스페인에서 철수하였다.


    -중남미 지역의 독립-
    경제적 수탈과 차별, 불평등으로 얼룩지며 300년간 이어진 중남미 지역의 스페인 식민통치는 현지인들에게 많은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루소나 몽테스키등에 의해 전파된 계몽주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사상은 식민지의 지식인들에게도 이미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가장 많은 불만을 품은 계층은 상류층에 속하는 크레욜로(식민지 출신 백인)들이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으나 스페인 본토 출신인 페닌슐라(Peninsulares)들에 비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차별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양측간의 갈등은 엘리트 계층에 속했던 크레욜로(Criollo)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였다.스페인이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에게 완패하며 대서양 무역 독점권을 상실하자 남미 식민지에서는 스페인과의 무역 독점체제에서 벗어나 유럽 각국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 독립이 진행되었다.정치적인 독립투쟁의 불길을 당긴 사건은 1807년 프랑스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침공이었다.다음해인 1808년에 나폴레옹이 스페인 왕위를 찬탈한후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책봉하자 중남미 식민지에서는 정통성을 문제삼아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런 권력의 공백은 1810년부터 중남미 지역에서 본격적인 독립 투쟁이 전개되도록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카를로스 4세)으로부터 식민지 통치권을 양도받았으나 민지 독립투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지난 트라팔가 해전에서 대패한 이후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으며,대륙봉쇄령에 맞선 영국의 해상봉쇄와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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