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0. 28.

    by. 멀티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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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뱅이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얼마나 기여하였는가에 대한 주제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세르베투스는 1530년 《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De Trinitatis Erroribus》를 출판하여 삼위일체는 "머리 셋 달린 케르베로스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망상이고, 마귀의 착상"이라 말했다. 세르베투스의 이러한 주장을 칼뱅을 비롯해 전 유럽이 알고 있었고, 외콜람파디우스는 실제로 그를 추방했다. 칼뱅은 1534년 세르베투스로부터 파리에서 만나 토론하자는 제안을 받으나, 세르베투스는 약속장소에 까닭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94] 1533년에 이미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종교재판소에서 공석 상태로 사형을 선고받았다.[95]

    칼뱅이 세르베투스를 처음 만난 것은 1546년의 일로, 지인인 리옹의 장 프렐론Jean Frellon의 소개로 만나 서신을 통해 교리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다. 이 때 칼뱅은 샤를 데스페비유, 세르베투스는 빌뇌브의 미셸Michel de Villeneuve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96] 세르베투스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주석을 달아 오류를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고, 칼뱅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격분하며 편지를 중단한다.[97]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 준다면 칼뱅이 있는 제네바에 가겠다고 밝히는데,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거절했다.[98][99]

    “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또 탄압 받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른 교리를 그토록 후안 무치하게 모욕하는 것 앞에서 저는 강철과 같이 굳세게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
    또 1546년에 칼뱅이 그의 동료 파렐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렇게까지 단호한 말을 적고 있다.

    “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온다 하여도 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제게 그런 권한이 주어진다면 그가 살아서 나가게 하는데 동조하지 않겠습니다.[95] ”
    1553년 세르베투스는 《기독교 강요》의 반론격인 《기독교 회복The Restoration of Christianity》을 출판하는데, 여기서 원죄를 부정하며 삼위일체에 대해 기괴한 이론을 주장하고, 예정론을 거부하고 도주한다.[100][101]

    비엔 공판 (가톨릭)
    같은 해 제네바의 개신교도이자 200인 의회의 의원인 기욤 드 트리Guillaume de Trie는[102] 자신을 가톨릭으로 전향시키려는 친척 앙투안 아르네Antoine Arneys에게, 비엔에 은신해있는 세르베투스 같은 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며 가톨릭을 비난하고 《기독교 회복》의 목차와 앞 4페이지를 보낸다.[103][104][105][106] 아르네이는 이를 리용의 권위자에게 보여주는데, 프랑스 도미니코 수도회의 종교재판관 마티외 오리Mattieu Ory의 귀에도 이 사실이 들어가자 결국에는 리옹 대주교이자 추기경인 프랑수아 드 투르농의 비서에게도 이 소식이 알려진다.[107][108][109] 이들은 세르베투스의 집을 조사하나 증거를 찾지 못해 아르네에게 더 많은 증거물을 요구한다. 이에 따라 아르네는 드 트리에게 편지를 쓰나, 처음에는 칼뱅의 거절로 인해 자료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계속된 부탁으로 인해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한 트리는 증거물로 칼뱅이 주고받은 편지를 아르네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110]

    “ 이 편지들을 칼뱅으로부터 얻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그는 세르베투스의 신성모독이 벌 받아 마땅하지만 정죄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은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잘못된 사상은 처형하기 보다는 가르침을 통해 징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도움 없이는 내가 거짓 증언자로 고소당할 것이라는 나의 말에 결국 이 편지들을 주었다. ”
    칼뱅은 그를 "스페인-포르투갈인"이라 부르며,[111] 최근에 유대교에서 개종해 콘베르소가 된 사실을 언급하고 고발한다.[112][113][114] 이후 4월 4일, 세르베투스는 체포되어 심문을 받기 위해 연행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이 편지가 자신의 글씨가 아닌 것 같다며 자신이 편지를 쓴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오히려 복음서 앞에서 맹세하고 "황제의 지배를 받는 나바라 왕국의 투델라 태생이고, 빌뇌브의 미셸이며 42세 정도 먹은 의학박사"라고 말한다.[115] 그러나 바로 다음날, "비록 세르베투스는 아니었지만 칼뱅과 논쟁하기 위해 세르베가(家) 사람임을 자처했다"고 말한다.[116] 4월 7일 새벽 4시, 세르베투스는 창문을 통해 도주한다. 6월 17일, 가톨릭교회와 시민법정은 그가 출석하지 않은 법정에서 "제네바의 전도사 장 칼뱅이 쓴 17통의 편지"를 근거로[117] "산 채로, 천천히, 몸이 숯으로 변할 때까지 불사른다"고 선고한다.[118][119]

    제네바 공판 (개신교)

    스위스 샴펠에 있는 세르베투스 기념비
    세르베투스는 평소 편지를 주고받던 데스페비유라는 가명의 칼뱅을 만날 의사를 밝히는데, 칼뱅은 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는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제네바를 방문하고, 결국 붙잡힌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그에게 화형을 선고한 상황이었다.[118] 그는 8월 13일 제네바의 성 피에르 교회에서 열린 칼뱅의 예배에 참석하고, 이를 포착한 칼뱅은 그를 체포하게 한다. 프랑스의 종교재판관들은 사형집행을 위해 세르베투스를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칼뱅은 평소에 자신을 반대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기독교의 정통성을 확고히 따르는지 보여주기 바랐기 때문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세르베투스를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으며,[120]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에 적극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으리라는 의견이 존재한다.[121] 세르베투스의 기소와 사형에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니콜라 드 라 퐁텐Nicholas de la Fontaine이다. 퐁텐은 제네바에 정착한 난민으로, 칼뱅의 추종자였으며 비서로 고용되었다.[122]

    세르베투스는 양태론적 단일신론 및 사벨리우스주의 등의 반삼위일체론과 반유아세례를 설파했다는 두 가지 혐의로 기소된다.[123] 유아세례에 대해 세르베투스는 "악마의 발명품으로 모든 기독교를 파괴하는 극악무도한 거짓"이라 말한 바 있다.[124] 이에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었고, 칼뱅은 이번 기회에 세르베투스의 이론을 철저히 논박해야할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칼뱅에겐 증인의 자격은 있었지만 재판의 자격은 없었다. 왜냐하면 칼뱅은 프랑스 국민으로서 스위스 제네바에 거주하는 외국인이었다. 그에게는 시민권이 없었고 그래서 투표권도 없었으며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다만 교사나 목사의 경우엔 적격한 시민이 없을 때 비시민이 그 직책은 맡을 수 있었고, 그래서 칼뱅은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다. 칼뱅이 세르베투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종교회의에서 뿐이었고,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시의회 주관이었다. 거기서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정죄할 권리는 없었다.[125] 칼뱅은 세르베투스가 "혐오스러운 신성모독"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칼뱅은 세르베투스가 체포된 지 약 일주일 후에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다음날 그[퐁텐]는 그[세르베투스]에게 40건의 고소장을 제출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이를 회피하려고 했었죠. 이에 따라 우리는 소환되었습니다. 그는 마치 내가 비위상한다는 듯 무례하게 나를 욕했습니다. 나는 그가 [벌을] 마땅히 받아야한다고 대답했죠... 그의 무례함에 대해선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는 악마에게 신성이 있다는 말을 주저없이 했습니다. 예, 신 여럿이 악마 개개에 들어 있고, 신성이 나무와 돌과 똑같이 이 악마들에게 본질적으로 전달되었다는 말을요. 최소한 사형이 선고될 것으로 기대됩니다만, 처형의 가혹함은 완화되면 좋겠습니다.[126]

    세르베투스는 재판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제네바에서의 재판은 비엔에서 열렸던 로마교회의 종교재판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제네바에는 정부에 대한 교회의 영향을 제거하려는 방종파가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는 세르베투스에게 승산이 있었다. 재판 관련 기록들을 보면 세르베투스의 어조에서 강한 자신감을 볼 수 있다. 그의 종교적 이단성을 증명할 증언자로 선 칼뱅에게 던진 그의 공격들 중엔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마술사 시몬 같은 자, 범법자, 살인자여 ...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판단하는 불쌍한 자 ... 거짓말쟁이이며 사악한 말다툼꾼 ... 너의 뻔뻔함은 눈이 희다는 사실도 논쟁하려는구나 ... 웃기는 난쟁이 같으니라고 ... 너의 짖음으로 재판장들의 귀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불쌍하구나, 불쌍해!"[125]

    세르베투스는 기독교 정통교리인 삼위일체를 계속 부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말을 보면 자신이 밟고 있는 '발등상도 하나님을 이루고 있는 물질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페랭의 동서인 피에르 티소Pierre Tissot가 이끄는 당회와 검사 필리베르트 베텔리어는 칼뱅을 괴롭히기 위해 세르베투스의 판결을 질질 끈다. 그러나 당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은 전 유럽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에 따라 제네바 의회는 이 재판의 책임을 분산시키며 또한 세르베투스가 제네바 시민이 아니었으므로 법적으로는 추방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국은 법을 초월할 구실을 찾기 위해 8월 21일 개혁교회를 따르는 주인 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에 자문을 구한다.[127] 10월 20일, 네 도시는 모두 세르베투스의 교리를 비난하며 억압해야한다 응답했으며, 베른은 자기 도시였다면 세르베투스가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라고 답했다.[128] 마르틴 루터는 강한 어조로 세르베투스의 저작을 비난한 적이 있었으며,[129] 필리프 멜란히톤과 세르베투스는 서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삼위일체의 부정은 신성모독으로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 신성로마제국법(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내용이었으며, 제네바 시의회는 최종 단계에서 삼 일에 걸친 논의 끝에 만장일치로 "가장 고통스런 사형" 곧 화형을 선고하였다. 이때 칼뱅은 의회 쪽에 감형을 요청하면서, 적어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참수형으로 바꿔달라고 구한다.[130][131] 그러나 시의원들은 거절하였다.[94][132] 평의회는 방종파인 아미 페랭이 주재했는데, 결국 10월 24일 삼위일체와 유아세례를 부정한 죄목으로 화형이 선고되었다.[133] 결국 10월 27일, 세르베투스는 제네바 가장자리에 있는 샴펠 언덕에서 그가 쓴 책더미 위에서 산 채로 불태워졌다.[80][134] 역사학자들은 그의 마지막 말을 "영원한 신의 아들 예수님,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록하고 있다.[135] 세르베투스는 칼뱅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을 당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12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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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뱅의 신학은 장 칼뱅의 작품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후대에서 형성한 신학을 포함하여 이르는 용어이다. 칼뱅의 신학의 중심 주제, 특징, 강조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다. 후기 칼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국가 및 신정통주의적 관점마다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 칼뱅의 신학의 중요한 점에 대하여 기독교 백과사전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그의 신학적 중요성이란 기독교 교리의 체계화를 시도한 것이다. 예정론에서, 기독론과 성례전에 근거하여 구원의 현재적 사역과 초월적 영원한 사역 사이에서 단순히 종말론적으로 수립한 구별에서, 중생에서(tertius usus legis, 율법의 3번째 용법) 믿음의 순종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 한점에서 그는 개혁신학에 지속적 영향을 주었던 정통주의를 세밀하게 만들었던 점이다.[137]

    칼뱅의 신학을 지배하는 원리는 인간론적이거나 구원론적이거나 교회론적이라기보다도 신학적이다. 카를 홀Karl Holl이 지적한 대로, “칼뱅의 신학적 활동의 중요성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그 중심에 놓은 데 있다. 칼뱅의 모든 개별적인 문제들은 하나님의 개념에서 절정에 이른다.” 기독교 강요와 주석들과 설교들과 논문들을 검토해 보면, 어디든지 칼뱅은 하나님 중심 사상, 즉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전면에 부각시킨다.[138]

    칼뱅의 신학은 그가 쓴 성경 주석이나 설교집,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기독교 강요》에서 가장 잘 정리된 형태로 나타난다. 칼뱅은 특히 기독교 신학에 관한 그의 주장을 요약하는 목적으로 이 책을 저술했으며, 주석과 함께 비교하며 읽히기를 바랐다.[139] 또한 이 책은 약간의 수정을 거치며 여러 판본으로 출판되었는데, 칼뱅의 신학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140] 1536년도 초판은 6장으로 구성되었지만 1539년 판은 필리프 멜란히톤의 《신학 총론Loci Communes》에 나타난 주제들 위에다가 몇 장을 더했기 때문에 3배로 길어졌다. 1543년 판에서는 사도신경에 관한 장에 새로운 자료를 더하고 확장시켰다. 마지막 개정판은 1559년에 출판된다. 이 판본은 총 네 권, 여든 장으로 구성되는데 1권은 창조주 하나님, 2권은 구속주 그리스도, 3권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 그리고 4권에서는 국가와 교회를 다룬다.[141]


    칼뱅의 신학을 요약한 《기독교 강요》의 마지막 판본으로부터의 한 페이지
    《기독교 강요》의 주제는 첫 문장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들에 대한 지식으로 나뉘며,[142]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타고나거나 세계를 관찰해서는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성경에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칼뱅은 "누구든지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선 성경을 이정표이자 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143] 그는 성경의 권위가 자증적autopiston이며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말하며, 다른 증명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는 삼위일체 이론을 변호하고, 성상이 우상숭배로 이어졌음을 지적하며 카톨릭교회를 강하게 비판한다.[144] 1권의 마무리에서는 "능력으로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품으시고 보존하시는데 섭리로 세상을 이루는 부분 모두를 다스린다"는 섭리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145]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좋든 나쁘든 항상 하나님의 뜻과 판단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146]

    2권에서는 원죄와 타락을 다루며 해당 교리를 발전시킨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한다. 이처럼 그는 교부들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종교개혁가들이 새로운 신학을 창작하고 있다는 당대의 비판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주해 12] 칼뱅의 관점에서 죄는 아담의 타락으로 시작되어 인류 전체에게 퍼진다. 죄의 지배는 완전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악에 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147] 따라서 인류는 구원을 필요로 했고,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부터 얻어졌다. 그러나 칼뱅은 이 교리를 체계화시키 이전에 구약시대에 살던 유대인에 대해 다르게 언급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리스도가 올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옛 언약은 그리스도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칼뱅은 그리고 사도신경으로부터 그리스도가 폰티우스 필라투스로부터 고난을 받았고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리라는 내용을 인용하며 새언약을 설명한다. 칼뱅은 그리스도가 삶 전체에서 성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불화를 제거했다고 주장한다.[148]

    3권은 어떻게 그리스도와 인간이 정신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룬다. 칼뱅은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굳고 확실한 지식으로 정의한다. 믿음의 즉각적인 결과는 회개와 죄 사함이다. 이후 영적 거듭남이 이루어져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거룩한 상태를 회복한다. 그러나 이를 죽기 전에 완성하기는 불가능한 것이어서, 평생동안 죄와의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칼뱅의 이론이다.[149] 이후 칼뱅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에 대해 몇 장을 거쳐 서술한다. 칼뱅은 칭의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받아주시사 의롭다 여겨주시는 것으로 정의한다.[150] 이에 따르면 구원을 개시하고 실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없는 것이다.[151] 책의 말미에서 칼뱅은 펠라기우스주의에 반해 아우구스티누스가 발전시킨 교리인 예정에 대해 설명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및 마르틴 루터 등의 다른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랐지만,[152] 칼뱅은 이들을 뛰어넘어 예정교리를 발전시켰다.[153] 칼뱅은 직접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154]

    칼뱅은 이 예정이 결국 구원받지 못할 자 역시 동시에 결정된 이중예정임을 인정하며, 몹시 두려운 명령이라고 고백한다.[155]

    마지막권인 4권에는 진정한 교회와 목회, 권위, 성찬에 대한 칼뱅의 견해가 드러난다. 그는 교황권의 우월성(영어판)과 동시에 다른 종교개혁가들을 이교라 비난하는 것 역시 부정했다. 칼뱅은 교회를 그리스도를 머리삼은 신자들로 구성된 것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가톨릭, 즉 보편교회는 단 하나만 존재할 뿐이었으므로 종교개혁가들이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해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156] 칼뱅은 교역자에 대해서는 에베소서에서 정의되듯 사도, 선지자, 복음사가, 목사, 교사doctor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인데, 이중 처음 세 부류는 오직 신약시대에만 존재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제네바교회에서는 마지막 두 직분만 두었다. 칼뱅은 세계 공의회를 존중했지만, 이들이 특별한 개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할 뿐이라고 여겼다. 칼뱅은 또한 시민권과 교회권은 독립적이어서 서로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157]

    저술
    성경주석과 설교와 논문과 서신 등이 종교개혁 전집 29권에서 87권까지에 수록되어 있다. 칼빈전집(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59 vols., ed. Wilhelm Baum, Eduard Cunitz, and Eduard Reuss. Corpus Reformatorum 29-87. Brunswick and Berlin, 1863-1900. Abbreviated as CO or Opp.)으로도 별도로 출판되었다.

    논란

    칼뱅의 성찬 교리에 반대한 요아힘 베스트팔
    칼뱅의 이론은 여러 논란을 야기했다. 로잔의 개신교 교역자인 피에르 카롤리는 1536년에 칼뱅, 비레, 파렐을 아리우스주의자라는 명목으로 고소한다. 칼뱅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카롤리의 비난에 대한 삼위일체 칭송문Confessio de Trinitate propter calumnias P. Caroli》를 남겼다.[158] 1551년에는 제네바의 의사인 제롬 에르메스 볼섹Jérôme-Hermès Bolsec이 칼뱅의 예정론을 두고 하나님이 죄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며 비난한다. 볼섹은 도시에서 추방당하고, 칼뱅이 사망한 뒤 칼뱅에 대한 악의를 품고 그의 전기를 작성한다.[159] 이듬해에는 순수 루터교(영어판) 신자인 함부르크의 요아힘 베스트팔(영어판)이 칼뱅과 츠빙글리를 두고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육체가 물질과 하나된다는 교리를 부정했다며 이단이라 비난한다. 칼뱅은 1555년, 《건전한 전통적 성찬교리에 대한 변호Defensio sanae et orthodoxae doctrinae de sacramentis》를 통해 이에 대한 답변을 남긴다.[160] 1556년에는 칼뱅이 프랑크푸르트에 머무는 동안 자유의지론자인 유스투스 벨지우스(영어판)의 요청에 의해 대중 앞에서 논쟁을 벌인다. 세르베투스가 사형당한 후에는 이단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실망한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와 절교하기도 한다. 카스텔리오는 《이단에 대하여Treatise on Heretics (1554)》에서 그리스도가 공허한 신학에 기대기보다도 도덕적인 가르침을 중요시하셨다고 서술하며 이 문제를 다루고,[161] 이후에 성경 원리에 입각한 교화론을 발전시킨다.[162]

    칼뱅과 유대인
    마르틴 루터와 비교할 대 칼뱅이 당대의 모든 주요 종교개혁가들 중에서 가장 덜 반유대적인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163] 칼뱅이 확고한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164] 학자들은 칼뱅이 성경속 유대인과 당대 유대인에 대한 태도를 구분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칼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새로운 언약과 다르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모든 약속의 자녀들은 사랑으로 작동되는 믿음으로 명령에 순종하며,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모두 새로운 언약에 속했다"고 말했다.[165]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언약신학자였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포용하기 전까지는 그 언약에 다시 들어갈 수 없는 민족이라는 것이 칼뱅의 주장이다.[166]

    칼뱅이 유대인에 대해 한 진술은 대부분 격렬한 비판이었다. 실제로 칼뱅은 "나는 많은 유대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나는 한 방울의 경건함도, 한 톨의 진실이나 솔직함도 본 적이 없다 – 아니, 나는 어떤 유대인에서도 상식을 찾지 못했다"고 적는다.[167] 이런 점에서 그는 당대의 다른 개신교 신학자나 가톨릭 신학자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168] 당대 유대인과 유대교의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룬 저작은 《어떤 유대인의 이의와 질문에 대한 응답Response to Questions and Objections of a Certain Jew》에서만 명시적으로 다루었다.[169][170] 그 속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을 놓치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 주장했다.[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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