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0. 28.

    by. 멀티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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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제네바 체류기1536~1538[편집]

     
    칼뱅을 제네바에 머울도록 한 기욤 파렐.

    초청[편집]

    제네바는 1526년 사보이아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베른  프리부르와 시민연대라 불리는 상호 방위 동맹을 맺은 뒤, 1536년에는 약 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로 성장한 상태였다.[30]

    그러나 제네바 주교인 피에르 드 라 봄Pierre de La Baume은 자신을 지원하는 사보이아 공작의 영향력을 제네바에서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1532년 이후 개신교 주가 된 베른을 계기로 삼아 기욤 파렐과 그를 돕던 사람들은 1532년 10월 이래 줄곧 제네바 종교개혁운동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베른의 도움으로 제네바는 사보이아 공작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에서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한다. 1536년 5월 21일에 제네바의 모든 시민은 파렐의 지휘 아래 종교개혁을 수용하기로 서약한다.[31]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은 칼뱅이 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개신교 부흥을 도와 달라고 간청한다. 칼뱅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 승낙하는데, 이후 이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러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던 파렐은 나를 성 안에 가두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내가 변두리에서 개인적인 공부를 계속하려 한다는것을 깨닫고, 간청하여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저주하면서 되돌아갔는데, 그토록 큰 도움이 필요한 때에 내가 돕는것을 망설이면 하나님은 나의 평화를 틀림없이 저주하실 것이라고 말했다.[32] 그의 말에 겁을 먹고, 나 자신의 소심함과 비겁함을 의식한 뒤 나는 여행을 포기하고 내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재능이라도 사용하고자 하였다.[33]
     
    — 칼뱅, 《시편 주석》 서문

    칼뱅이 파렐의 제안을 받아들일 당시에는 아무런 기반도 없던 상태였다.[34] 칼뱅은 바젤로 되돌아가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난 후, 1536년 9월 5일 이전 어느 시점부터 제네바의 성 피에르 교회에서 바울로 서신들을 강해하는 성경교사reader로서의 임무를 시작한다. 1537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35] 이로써 그는 법률가임에도 불구하고 세례, 결혼, 목회를 수행하게 된다.[36]

    칼뱅은 그 해 10월, 파렐과 피에르 비레와 함께 로잔에서 열린 공개 종교 토론에 참석하는데, 교부들에 대한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일설에 의하면 칼뱅은 히포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책 페이지와 줄 수까지 정확하게 인용할 정도로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네바로 돌아가기 전에 베른에서 열린 또 다른 종교회의에 참석했다.[37]

    추방[편집]

    1536년 말, 파렐은 신앙고백의 초안을 작성했고, 칼뱅은 제네바 교회 재편에 대한 글을 썼다. 1537년 1월 16일, 칼뱅과 파렐은 작성한 글을 갈음하여 《교회의 조직과 제네바 예배에 관한 연구Articles concernant l'organisation de l'église et du culte à Genève》을 시의회에 제출한다.[38] 이 글에서 성찬식의 빈도와 방식, 이유와 방법, 파문, 신앙고백의 요건, 전례에서 회중창의 사용법, 결혼법 개정 등이 기술되어 있었다. 의회는 당일에 그 글을 받아들였다.[39]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시의회는 칼뱅과 파렐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시의회는 지금까지 신앙고백을 한 시민들 중 소수만이 요건을 충족했기 때문에, 신앙고백의 요건을 강제하는 것을 꺼렸다. 11월 26일, 칼뱅과 파렐, 두 교역자가 이 문제를 놓고 의회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는 제네바와 동맹을 맺고자 한데다가 이 둘이 모두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의원들은 그들의 충성심을 의심한다. 마침내 스위스 교회개혁의 동맹국인 베른시가 교회 의식을 일치시키자고 제안함으로써 갈등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제안은 무교병으로 성찬을 행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두 교역자는 베른의 제안을 거부했고, 결국 취리히 교회회의가 소집되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규칙은 적용되지 않았다. 의회는 칼뱅과 파렐에게 부활절 성찬을 위해 무교병을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 둘은 이에 항의하여 부활절 예배에서 성찬식을 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소요가 일어나 결국 다음날인 1538년 4월 25일, 의회는 칼뱅과 파렐에게 제네바를 떠나라고 명령한다.[40]

    이 둘은 이후 베른과 취리히에 들러 무죄를 주장한다. 이에 따라 열린 취리히 교회회의에서, 베른으로 하여금 제네바와 이 둘 사이를 중재하도록 한다. 그러나 결국 이 둘은 제네바에게 거부당한 뒤, 바젤로 돌아간다. 몇 주 후 파렐은 뇌샤텔의 교회에 부임했으나, 칼뱅은 바젤에 남아서 공부에 전념한다. 이 때 마르틴 부서 볼프강 카피토가 스트라스부르로 와 줄 것을 제안하나, 칼뱅은 파렐도 함께 가야 한다며 처음에는 거절한다. 그러나 1538년 9월에 스트라스부르로 이동하고, 몇 달 뒤 시민권을 획득한다.[41]

    스트라스부르 체류기1538~1541[편집]

     
    칼뱅이 1538년에 부임한 스트라스부르 성 니콜라 교회. 19세기에 재건축되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칼뱅을 스트라스부르로 초대한 마르틴 부서.

    초기[편집]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동안 칼뱅은 한 교회에 특별히 머물지 않고 성 니콜라 교회 생마들랭 교회, 구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교회였던 뇌프 사원에 순서대로 임직한다.[42] 이후 4~500명가량 되는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매 주일 두 차례 설교한다. 매달 성찬식을 거행하였으며, 시편의 회중합창을 장려하였다.[43] 그는 또한 《기독교 강요》 2판의 작업을 시작하는데, 기존의 문답체가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44]

    1539년, 칼뱅은 문답식이었던 기존의 책을 핵심교리를 체계적으로 나열하는 식으로 개편한다. 이 때 총 6권이었던 책을 7권으로 확장하는데, 순수 분량은 거의 3배가량 늘어났다.[44] 또한 같은 시기에 《로마서 주석》도 작업하여 이듬해 3월에 출판한다. 이 책에서 칼뱅 후기 주석서의 주석법과 전개법의 전형이 나타난다. 불가타 성경을 가져다 쓰는 대신 헬라어 구절을 직접 번역하였다.[45] 칼뱅은 헌정서에서 전임자 필리프 멜란히톤, 하인리히 불링거, 마르틴 부서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자신의 작품과 그들의 작품을 구별하며 비평하였다.[46] 또한 이 기간에 여럿의 부탁으로 평신도들에게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하는 내용의 《성만찬 소고Treatise on the Lord's Supper》도 작성하여 1541년 제네바에서 출판한다.[12][47][48]

    결혼[편집]

    이 때 주변에서 결혼할 것을 제안하는데, 칼뱅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장한다.

    나는 독신주의를 반대하는데,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안 할지도 모른다. 내가 아내를 맞이한다면, 수많은 염려에서 더 해방되어 주님께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49]

    여러 명의 신부 후보가 나타났는데, 그중에 귀족 영애가 한 명 있었다. 칼뱅은 그녀가 프랑스어를 배운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계획한다. 1540년 3월 결혼 날짜가 잡혔지만, 칼뱅은 달갑지 않아했기 때문에 결국 결혼식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중에 "주께서 나의 지혜를 완전히 가져가지 않으시는 한" 결혼할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라 쓴다.[50] 대신 그해 8월, 두 아이가 있는 미망인 이델레트 드 뷔르와 결혼한다.[51]

    제네바의 재초청[편집]

    제네바는 칼뱅에 대한 제명을 재고했다. 베른과 제네바가 땅을 놓고 다투면서 동맹은 무뎌지고, 교인은 줄어들었다. 야코포 사돌레토 추기경은 제네바 시의회에 가톨릭으로 돌아올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썼고, 시의회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교계 고문을 물색한다. 피에르 비레가 처음 자문을 부탁받았으나 거절하자 의회는 칼뱅을 찾아간다. 당시 제네바에는 파렐과 칼뱅의 후원자인 기예르맹Guillermin파가[주해 9] 있었는데, 여기에 속한 마튀랭 코르디에와 아미 페렝 등은 새로 부임한 목사들을[52]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참이었다.[12] 칼뱅은 이를 승낙하여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Responsio ad Sadoletum》으로 교회 개혁에 관한 제네바 입장을 강하게 옹호했다.[48][53]

    2월에 아르티퀼랑Articulants파와[주해 10] 기예르맹 파는 서로간의 의견 차이를 극복했고, 칼뱅은 제네바에서 자신을 돌아오게 하기 위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2] 1540년 9월 21일, 시의회는 기예르맹 파인 시의원 아미 페랭에게 칼뱅을 소환할 방법을 찾도록 명령한다. 한 대사가 칼뱅이 보름스에서 종교 대담을 하는 동안 그에게 도착한다. 그러나 칼뱅은 이 제안에 대해 하루에도 천 번씩 죽었던 그 십자가(제네바의 1차 체류) 위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식으로 백 번 죽는 게 낫다는 식의 공포어린 반응을 보인다.[54] 그러나 10월 24일에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러나 제 자신의 주인이 제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저는 제 심장을 도려내어 희생 제물로 주님께 바칩니다.
     
    — 칼뱅, 파렐에게 보낸 1540년 10월 24일자 편지[주해 11]

    부서와 칼뱅이 다음 단계를 결정하기 위해 제네바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는 6개월간, 피에르 비레가 제네바에서 임시로 종교 고문을 맡는다. 시의회는 1541년 5월 1일에 만장일치로 칼뱅을 다시 청빙하고, 결국 1541년 초에 스트라스부르는 칼뱅을 제네바에 6개월 동안 빌려주기로 결정한다. 칼뱅은 1541년 9월 13일 공식 호위와 마차를 가지고 제네바로 귀환한다.[55]

    2차 제네바 체류기1541~1554

    제네바 개혁

    여섯 명으로 구성된 시의회와 칼뱅, 그리고 또 다른 네 명의 제네바 목사들은 새로운 교회법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9월 26일 새로운 안을 시의회에 제출한다.[12] 제네바 의회는 이를 지지하며 1541년 11월 20일 《교회법규Ordonnances ecclésiastiques》을 통과시켰다.[48] 조례안에는 설교와 성사를 행하는 목회자, 믿음으로 신자를 가르치는 교사doctor와 권징을 제공하는 장로, 가난한 자와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집사 등 4가지 교직에 대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56] 의회는 또한 장로와 목회자로 구성된 교회정치기구인 제네바 컨시스토리(치리회(영어판))의 창설을 요구하여 민사 관할권이 없는 교회내 문제를 판단하는 전문 기구를 창설한다. 컨시스토리는 판결을 내릴 수 있었는데, 특히 가장 중한 형벌로 파면을 선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 당국은 이 권력에 이의를 제기했고, 1543년 3월 19일 의회는 모든 판결을 정부가 집행하도록 한다.[57]

     
    칼뱅이 설교한 제네바의 생피에르 대성당

    1542년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용된 예배책을 각색하여 《기도와 교회 찬송의 양식La Forme des Prières et Chants Ecclésiastiques》을 출판한다. 칼뱅은 음악의 힘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성경을 읽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원래의 스트라스부르 시편집(영어판)에는 클레망 마로가 쓴 12편의 시편이 들어 있었는데, 칼뱅은 제네바 판에 자기가 작곡한 찬송가를 몇 곡 더 추가한다.[58] 같은해 《제네바 교리문답Catéchisme de l'Eglise de Genève》을 집필하는데, 이는 과거에 마르틴 루터 루터 대교리문답서에 기반하여 쓴 교리 문답을 신학적 목적으로 재편성한 것이다.[59]

    당시 제네바에서는 많은 성직자들이 엄청난 권력을 휘두름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칼뱅이 교회와 정치를 분리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제네바가 신권 정치체계였는가에 대해 많은 역사가들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60][61]

    칼뱅은 제네바에서 그의 사역을 하는 동안 2천번이 넘는 설교를 했다. 칼뱅은 처음에 일요일에 두 번, 주중에 세 번씩 설교를 했는데, 1542년 말 의회는 일요일에 단 한 번만 설교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1549년 10월에는 다시 다시 일요일에 두 번, 격주 평일마다 모든 평일에 설교를 하도록 요구받았다. 설교는 보통 한 시간 이상 지속되었고 별도의 노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가끔씩 비서가 설교를 기록하려 했으나, 1549년에 전문 서기 드니 라게니에Denis Raguenier가 배정되어 모든 설교를 기록하기 전에는 설교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칼뱅의 설교 스타일은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지 않고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2][63] 또한 칼뱅은 여러 설교에서 한 가지 주제를 이어 설명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대표적으로 1555년 3월부터 1556년 7월까지 신명기에 대한 설교를 200편 했다.[64]

    볼테르 루터 츠빙글리와 함께 칼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들이 사제들의 독신주의를 규탄하고 수녀원의 대문을 연다면, 사회를 수녀원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종교에서는 공연과 향연이 명백히 금지되었다. 그리고 200년 이상 제네바 도시에는 단 하나의 악기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비밀 고해를 비난했는데, 공동 고해도 금지했다. 이는 스위스, 스코틀랜드, 제네바에서 참회와 같은 방식으로 행해졌다.[65]

     
    이델레트와 칼뱅은 후손을 남기지 않았다.

    칼뱅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으나, 동생 앙투안의 가족과 자신의 가족이 모두 들어가 살 정도로 큰 집을 의회로부터 제공받아 사용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또한 1542년 7월 28일 칼뱅과 이델레트 사이에 아들 자크Jacques가 태어났는데, 조산아였던 터라 곧 사망한다. 이델레트 역시 1549년 3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칼뱅은 아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습니다. ... 살아생전에 그녀는 나의 직무를 완성시키는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하게라도 나의 길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다.
     
    — 칼뱅, 피에르 비레에게 보낸 4월 7일자 편지

    칼뱅은 제네바에서 몽모르, 코르디에, 콥, 파렐, 멜란히톤, 불링거 등과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우정을 남은 시간동안 계속 유지했다.

     
    16세기 칼뱅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제네바 대학교 소장. 화가 미상.

    반대파의 부상

    그러나 제네바의 사역은 곧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칼뱅에 대한 반대세력은 1546년에 한데 뭉쳤는데, 칼뱅은 이들을 방종파라고 불렀으나 그들은 스스로 애국자나 정신주의자로 불리길 원했다.[68][69] 이들은 불가항력적 은총으로 인해 교회법과 민법 모두에서 면제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며, 부자들과 정치인이었는데 대부분 친척 관계였다.[70] 1546년 1월 말, 한 차례 치리회와 갈등을 겪은 적이 있는 카드 제작자 피에르 아모Pierre Ameaux는 칼뱅을 향해 프랑스에 대한 멸칭인 피카르Picard라 부르며 그의 교리를 고발하였다. 그러나 아모는 도시를 행진하며 신에게 용서를 빌면서 강제로 속죄하는 처벌을 받는다.[71] 몇 달 후 칼뱅을 제네바에 데려오는 데 애썼던 아미 페랭이 칼뱅에게서 공개적으로 돌아선다. 페랭은 제네바에 정착한 상인 프랑수아 파브르의 딸과 결혼했는데, 페랭의 아내와 장인 모두 예전에 치리회와 갈등을 겪은 적이 있었다. 제네바 법원은 페랭을 포함하여 여러 유명인들이 춤을 금지한 법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페랭은 법정의 소환 요청을 무시했으나, 칼뱅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뒤 치리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72] 페랭의 어머니도 별개로 고소당했는데, 치리회가 열리기 하루 전에 도망친다.[12]

    1547년, 아미 페랭이 시의 군사장관으로 임명되면서[73] 제네바의 행정관인 시민대표(영어판)의 대다수를 칼뱅 반대파가 차지한다. 6월 27일에는 제네반 방언으로 적힌 익명의 협박편지가 칼뱅이 설교하는 성피에르 대성당의 강단에서 발견된다. 이후 의회는 이에 대한 조사 위원회를 수립하여 결국 자크 그루에를 체포해 7월 26일 참수한다. 칼뱅은 법원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74]

    방종파들은 계속해서 임명된 교역자들을 모욕하고 치리회의 권위에 도전했는데, 의회는 칼뱅을 훈계하기도 하고 지지하기도 하면서 정확한 위치를 정하지 않았다. 칼뱅의 권위는 1552년 2월 페랭이 제1시민대표로 선출되었을 때 바닥으로 떨어진 듯 보였다.[76] 칼뱅은 이에 1553년 7월 24일 의회에 자신의 사임을 요청하나, 당시 방종파가 의회를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청은 수리되지 않는다. 반대파는 칼뱅의 권위를 실추시킬 힘은 있었지만 추방할 정도는 아니었다.[77]

    미카엘 세르베투스

     

    그러나 1553년 8월 13일,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나타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 유아세례를 과감히 비판하였으며, 1530년 7월에는 바젤에서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와의 논쟁 끝에 추방되었었다.[78] 그는 이후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삼위일체에 반대하는 팜플렛을 배포했는데, 마르틴 부서는 이를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세르베투스를 쫓아낸다. 세르베투스는 바젤로 돌아와 《삼위일체에 관한 두 편의 대화록Dialogorum de Trinitate libri duo》을 출판하는데, 개신교와 가톨릭 양쪽 모두에게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그를 잡아오라 명한다.[79] 이후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들리는데, 붙잡혀 제네바 법정으로 끌려온다. 제네바의 검사와 치리회는 칼뱅을 괴롭히기 위해 재판을 질질 끄는데, 당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은 전 유럽에 알려진 것이어서 결국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한다.[80]

    다시 개혁으로[편집]

    세르베투스가 죽은 후 칼뱅은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칼뱅은 이사회가 파문권을 가져간 결정을 계속 비판하며, 치리회가 그 권리를 가져가야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에 교역자를 모욕한 혐의로 파문된 필리베르트 베텔리어는 세르베투스의 재판기간 동안 자신의 재입교를 의회에 간청한다. 그러나 칼뱅은 의회가 파문을 뒤엎을 법적 권한이 없다며 항의한다. 이후 칼뱅은 의회가 자신을 내쫓을 것이라 여겨 1553년 9월 3일의 설교에서 자신이 해임될 수도 있음을 암시했는데, 실제로 의회는 칼뱅의 임직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9월 18일, 의회는 칼뱅을 지지하기로 결정했으며 파문권도 치리회에게 양도한다. 그러나 베텔리어는 의회의 결정에 반발하여, 또 다른 행정조직인 200인 의회(Deux Cents)에 자신의 재입교를 요구한다. 200인 의회는 시의회의 결정을 번복하는데, 교역자들은 이 결정에 반발하여 세르베투스 때처럼 스위스 교회의 의견을 구한다. 1년이 넘게 흐른 뒤인 1555년 1월 22일, 스위스 교회는 칼뱅의 임직을 유지하며 파문권을 치리회에 양도할 것을 결정한다.[81]

    이후 1555년 2월의 선거에서 방종파는 완전히 몰락한다. 프랑스 난민들이 제네바로 많이 유입된데다 스위스 교회의 결정까지 합쳐져, 칼뱅파가 시민대표 및 시의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5월 16일, 방종파는 술에 취한 채 거리로 나와 프랑스사람들의 집을 불태우려 한다. 시민대표 앙리 올베르Henri Aulbert는 시민대표에게 주어지는 을 들고 다니며 이를 저지하고자 했는데, 페랭이 이를 뺏어잡고 군중들 위로 흔들었는데 이는 쿠데타를 시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후 다른 시민대표가 나타나 페랭에게 함께 시청으로 가자고 명령함으로써 소요가 끝난다. 이후 칼뱅의 승인에 따라 12명의 방종파에게 사형이 선고되는데, 세 명에게 형이 집행되고 페랭을 비롯한 다른 세 명은 시를 탈출한다. 이로써 칼뱅의 정치체가 확립된다.[12][82] 제네바에서의 일이 일단락되자 칼뱅은 바깥에도 눈을 돌린다.

    말년1555~1564

     
    53세 무렵의 장 칼뱅

    이후 제네바에서 칼뱅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전 유럽에서도 마르틴 루터와는 구분되는 종교개혁가로서의 명성을 칭송했다.[83] 칼뱅과 루터는 처음에는 서로를 깊이 존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 사이에서 성찬에 대한 교리를 두고 갈등이 벌어지는데, 루터는 칼뱅을 츠빙글리 진영으로 묶어 분류한다. 칼뱅은 루터교 칼뱅주의 개혁 교회간의 논쟁에 활발하게 참여한다.[84] 그러나 이와 동시에 칼뱅은 개혁 교회가 단합이 잘 안된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칼뱅은 제네바 교회와 하인리히 불링거의 취리히 교회간의 콩고르다툼인 《일치신조Consensus Tigurinus》를 맺음으로써 친선관계를 맺는다. 또한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가 모든 복음주의 교단들의 교회 일치를 위한 교회회의를 소집할 때 그에게 손을 뻗으나, 크랜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85]

    칼뱅은 메리 1세 시절 발생한 개신교 피난민들을 1555년부터 제네바에 수용한다. 시의 보호 아래 존 녹스 윌리엄 위팅햄(영어판) 등의 유명한 개혁교회 지도자들도 이 때 제네바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는 이후 칼뱅의 교리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전파되는 계기가 된다.[86]

     
    스위스의 중등 교육기관인 칼뱅 콜레주

    제네바 아카데미

     이 부분의 본문은 제네바 대학교입니다.

    칼뱅은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은 콜레주(프랑스어: collège)를 구상한다. 1558년 3월 25일에는 장소가 정해지고, 이듬해인 1559년 6월 5일에는 학교가 문을 연다. 칼뱅이 시민권을 얻은 것도 1559년의 일이다.[12] 이렇게 세워진 학교는 소년예비학교이자 문법 등을 가르치는 콜레주, 혹은 사립학교(라틴어: schola privata)와,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아카데미(프랑스어: académie), 혹은 공립학교(라틴어: schola publica)로 나뉘었다.[87] 칼뱅은 이를 위해 로잔에 있는 은사 마튀랭 코르디에와, 케임브리지의 히브리어 흠정교수(영어판) 임마누엘 트레멜리우스를 초대한다. 비록 이 둘은 모두 요청을 거절했지만, 테오도르 드 베즈는 요청을 승낙하여 학장으로 취임한다. 개교 후 5년 뒤에 콜레주에는 1,200명이, 아카데미에는 300명이 재학한다. 이 아카데미는 제네바 대학교의 전신이 되었고, 콜레주는 현재 칼뱅 콜레주(영어판)가 되었다.[88]

    프랑스에 끼친 영향

    칼뱅은 조국인 프랑스의 개혁에도 노력했다. 개신교 운동은 활력 측면에서는 왕성했으나 조직적인 방향 제시는 전혀 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제네바 소재 교회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칼뱅은 프랑스에서 개신교의 명분을 높이는 쪽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이해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그는 교리, 전례, 새로운 도덕적 종교 사상을 공급했고, 이와 조화를 이루는 교회, 정치, 사회제도도 만들었다. 타고난 지도자였던 그는 개인적 호소와 함께 이러한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가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과 주고받은 방대한 서신은 많은 열정뿐만 아니라 끝없는 노고와 상당한 재치와 함께, 그의 논문들의 교훈을 고향에 전해주었다.[89] 1555년에서 1562년 사이에 100명 이상의 교역자가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왕 앙리 2세 샤토브리앙 칙령(영어판)에 따라 개신교 신자들을 심하게 박해했고 프랑스 당국이 선교활동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자, 제네바 시의 신부들은 공식적인 책임을 부인했다.[90]

     
    칼뱅의 묘소라 알려진 무덤. 실제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질병과 최후[편집]

    칼뱅은 1556년부터 쇠약해져 1558년 말에 열병에 걸려 이듬해 초까지 심하게 앓는다.[12] 칼뱅은 《기독교 강요》 최종 개정이 끝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작업을 재개하고, 최종적으로 작가 본인이 새로운 저작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크게 확장되어 출판된다. 이전판에서는 21장이었던 것이 80장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주제가 추가된 것 보다는 기존 내용이 더욱 충실해진 것이다.[91] 칼뱅은 병상에서 일어난 직후 설교를 하던 도중 목소리에 경련을 일으키며 격렬한 기침 발작을 일으켰다. 허파의 혈관이 터졌고, 꾸준히 쇠약해졌다. 결국 1564년 2월 6일에 성 피에르 대성당에서 한 설교가 그의 인생 최후의 설교가 되었다. 4월 25일에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자신의 가족과 콜레주에 소액을 남겼다. 며칠 후 교역자들이 그를 찾아와 작별을 고했는데, 이 작별인사는 《교역자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Discours d'adieu aux ministres》에 기록되어 있다. 칼뱅은 제네바에서의 삶을 회상하며 자신이 때때로 겪었던 고난을 뼈저리게 회상했다. 5월 2일에는 짧은 편지를 보낸 연로한 파렐도 칼뱅을 방문했고, 19일에는 다른 목사들과 함께 그의 집에서 정기모임을 가졌다.[12] 칼뱅은 1564년 5월 27일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제네바에 묻혔으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덤을 보러 왔기 때문에, 다른 개혁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성인 숭배 사상을 배양했다는 비난을 받을까 봐 두려워했다. 결국 다음 날, 왕립묘지(영어판)의 아무 표지도 없는 무덤에 묻혔다.[92]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19세기에 칼뱅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 석비 하나가 설치되었다.[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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