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1. 2.

    by. 멀티 존

    728x90
    300x250

    중화민국(중국어: 中華民國)은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1912년 1월 쑨원의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수립된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이다.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북양 정부 및 북양 군벌 통치 시기에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국내외 여러 요인 때문에 같은 시기에 중앙 정부가 2개 존재하던 시기도 있었다. 쑨원은 난징시에 중국국민당 정부를 재구축하였으며 장제스의 북벌로 이어졌다. 왕징 웨이 등은 우한시에 독자 정부를 수립하기도 했으며, 일본 제국 점령기에는 난징시에도 독자 정부를 수립했다. 한편 중국동산당은 국공 분열 이후 또한 독자적인 정부를 세웠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황제 제도의 부활을 꾀하는 등 정권욕을 채우려다가 실패하였고 1917년에는 정쉰이 선 통제의 복위를 꾀했다가 실패하였다. 그 후 돤치루이, 오해부, 장쭤린, 펑 위 제기랄 등의 군벌이 권력 다툼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 틈을 노린 일본은 독일이 소유했던 산둥반도의 권익을 승계하는 한편 중국에 대하여 21개 조 요구 사항을 승인하도록 강요하였고 군벌 돤치루이와 결탁함으로써 중국 진출에 성공하였다. 1923년 이후 세계열강들은 앞다투어 중국에서의 이권 쟁탈에 주력하였고 이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지식인 외세 배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중국국민당 제1회 전국 대표대회가 열러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고 1925년 쑨원이 죽은 후 국민당은 광둥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다음 해엔 1926년 북벌을 개시하여 상하이, 난징을 점령하였다. 1928년에 공식적으로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이 북벌을 완수하였고, 수도를 난징시로 천도하였다. 중국국민당에 집중된 권력은 그 권력의 중추였던 장제스의 권력을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청나라의 영감을 대부분 주장했지만 1921년 이후 독립한 몽골과 아직도 잔류한 각지의 군벌들 그리고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에 설치된 사실상의 자치국이 문제로 떠올랐고, 그들의 잠재적 라이벌인 중국공산당은 장시성에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며 그들에게 맞서기에 이른다. 사실상 난징과 그 주위만 장악한 그들은 그들의 영토를 주장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 제국은 관동군을 동원하여 만주를 장악하고 만주국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국민당의 군대인 국민 혁명군은 잠재적 라이벌인 공산당을 추출하나 살아남은 마오쩌둥과 남은 인물들은 서북 산서를 향한 장정에 오른다. 그러나 장쉐량의 시안 사변과 국외에서 점점 중국을 압박하며 중국에 대한 전쟁의 위협을 가하는 일본으로 인해 국공 합작을 선언하고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군은 제2차 세계대전 승리 전에 아주 큰 패배를 많이 겪으며 패전하며 중국민이 가장 학살당한 끔찍한 사건인 난징 대학살이 발생하고 왕징 웨이의 배신으로 괴뢰 정부가 수립되기도 했으며 중국 각지에서 괴뢰 정권이 수립된다. 이에 내몽골에서 데모치 그 돈 로브(덕왕)가 몽강연합자치정부를 선언하면서 중국의 상황은 날로 암울해져 가기도 했다. 중국에 대한 연합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처한 중국이었지만, 1945년,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인해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9월 2일에 도쿄만에서의 항복 문서의 서명으로 인한 일본 제국의 패망이 선언되었다. 패망 후, 내전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쌍십협정의 체결로 봉합되는 듯하던 갈등이었지만, 미국은 양 당을 모두 지원한다고 했지만, 국민당을 지원하였고 소련은 여순항을 조차한다는 조약을 맺지만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공산당은 합작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면서 합작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였고, 결국 국민당은 1947년 공산당을 배제한 채 공식적으로 중화민국 헌정의 성립을 선언하였고, 이것이 제2차 국공내전의 계기가 되었다. 1948년에 중화민국 헌법이 공표되었지만 국민당군은 밀리기 일쑤였고, 중공과 전쟁에서 결국 패하면서 대륙에서의 국민 정부는 타이완으로 천도하게 된다. 1924년 중국국민당 제1회 전국 대표대회가 열러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고 1925년 쑨원이 죽은 후 국민당은 광둥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다음 해엔 1926년 북벌을 개시하여 상하이, 난징을 점령하였다. 북벌군 사령관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손을 잡은 무한 정부와 대립하였으나 얼마 후 무한 정부도 공산당과 결별하고 난징 정부와 합류하였다. 그 후 북벌이 재개되고 1928년 봉 천파 군벌 장쭤린이 일본에 의해 폭살 되자 그의 아들 장쉐량이 장제스와 손잡음으로써 중국 전토가 국민당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난징을 수도로 하는 중국국민당 주도의 국민정부(중국어: 國民政府)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국민정부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주의를 택하고 오로지 '공산당 타도'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폈으나, 시안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 민족통일 전선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국동 간의 반목이 일어나고 태평양 전쟁 종결과 함께 국공합작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국동 양측은 미국 특사의 중재로 정치협상 회의를 열어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였으나 결국 국공 내전으로 번졌다. 내전에서 국민당은 패배하고, 공산당은 1949년 10월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한편 중화민국 정부는 장제스와 중국국민당에 의해 타이베이시로 옮겨졌다. 국공 내전 이후에 중화민국은 중국과 일부 부속 도서의 주권을 ‘상실’하였으나, 이후에도 ‘중국의 정통 정부’임을 자임하면서 지금까지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차지하고 있는 중국 본토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한편 당시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은 중화인민공화국 대신 중화민국을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로 인정했다. 그러나 인도, 소비에트 연방 등 공산권 혹은 제3 세계권 국가와의 관계가 끊어졌으며, 영국, 스웨덴, 프랑스, 스위스를 시작으로 중화민국을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는 서방 국가가 계속 늘어났으며, 1971년 유엔에서 대표 자격이 경질되고 탈퇴하기에 이르자 더 많은 국가가 중화민국의 승인을 취소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했다. 1979년 최대 우방국이었던 미국도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이후 세계적으로 중국의 정통 정부로 승인되지 않는 미승인 국가와 같은 상황에 빠지게 되어 대외적으로는 정식 국명이 통용될 기회가 크게 제한되었다. (중화민국의 정치와 중화 타이베이를 참고) 1992년에는 아시아의 마지막 수교국이던 대한민국마저도 단교하게 되면서 고립이 심화하였다. 2010년 현재 이 나라를 승인(중국의 정통 정부로서)하는 나라는 겨우 23개국에 불과하다.

    반응형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뮌헨 폭동  (0) 2022.11.08
    커피의 역사  (0) 2022.11.05
    신해혁명의 의의와배경  (0) 2022.11.02
    한복 역사  (0) 2022.10.31
    도카이 지진의역사  (0) 2022.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