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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중국어: 辛亥革命, 병음: XīNhài gémìng 신하이거밍[*])은 1911년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혁명이다. 이 혁명은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라서 공화혁명(共和革命)이라고도 불린다.1900년의 의화단 운동 이후 열강의 침입이 한층 강화하는 가운데 청나라 조정은 정치 개혁을 꾀하는 소위 '신정' 운동을 일으켰으나 납세 거부와 기독교 배척을 위시한 대중 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입헌군주제를 향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일변 혁명파를 지휘, 반청(反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런 정세하에서 쑨원은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를 제창하는 1911년 청나라가 철도 국유령을 내려 민영이었던 철도를 담보로 열강에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자 반대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나 대규모 무장투쟁인 쓰촨봉기로 결국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10월 10일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하여 신해혁명의 불길이 당겨져 약 한 달 만에 14 성(省)이 이에 호응하여 궐기했고12월 말에는 17개 성으로 확대되어 청조에 독립을 선포하였다.1912년 1월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혁명 주체의 단결력과 세력이 굳건하지 못한 탓에 청조에게 대권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와 타협, 선통제의 퇴위로 청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한 대신 쑨원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다!.쑨원은 이후에도 혁명 정책을 맡았으며 서양열강과 같이 노비해방을 필요성을 가지고 당시 중국 인구 80%이상을 차지하던 농노비 백성들을 해방시켜 소수 귀족들에 의한 노역과 소작농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인구 80% 이상이 성씨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일부 소수 족보를 가진 귀족들만 사용하던 성씨를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대대적 민적법을 통해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백성들을 한족 민적법에 등록하는 것을 추진하였다.1911년이 신해년(辛亥年)이라서 신해혁명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혁명(제1차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됐지만, 곧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면서 이후 제제(帝制)의 야심을 품고 혁명파를 탄압하는 일편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는데 1913년 7월 국민당에서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려는 운동하면서 혁명을 호소하여 봉기했다. 이를 제2차 혁명이라고 하나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했다.이후 위안스카이는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 수락을 위시해 매판성을 드러내어 이런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에 민중은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를 ‘제3차 혁명’(호국전쟁)이라고 부르고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내전과 군벌의 할거로 혼란이 계속되었다.우창에서 최초로 봉기한 10월 10일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중화민국에서는 중요 국경일인 “중화민국 국경일”로 기념한다. 신해혁명은 20세기 아시아에서 일어난 정치사에 관계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배경-쓰러져 가는 청나라
제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계기로 서구의 무기를 주목하게 된 청의 관리들이 1860년대 중반에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수산업을 시작했다. 이런 시도는 차츰 민수 부문으로 확산되어 근대 특징이 될 만한 경향이 있는 광공업의 발전, 전신선과 철도 부설, 해군 양성과 유학생 파견, 신식 교육기관 설립까지 광범위하게 서구식 개혁을 도모했다. 양무운동 초기에는 청조가 반란 진압에 성공하여 “同治中興동치중흥”이라고까지 회자됐지만 부국강병의 결과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양무운동 기간에 있었던 대외 전쟁(1884년 청불전쟁, 1894년 청일전쟁)에서 군사상으로 승리하지 못했으며, 양무 기업 대다수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므로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할 무렵에는 부국강병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양무운동 실패 요인과 한계는 관리의 기업 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에 속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점이 주류였다. 특히 개혁을 지향하는 관리들이 지방에 분산된 채 통일하는 계획 없이 사업을 추진했으므로 급변하는 정세 변화에 효율로 대처하지 못한 점이 커다란 문제였다.
변법자강운동-청일전쟁을 계기로 양무운동의 파탄이 드러나자 그동안 서구의 정치제도 도입, 즉 제도상 개혁을 주장해 온 변법론이 힘을 얻었다. 변법을 주장하는 하급관리 캉유웨이(강유위)의 개혁 주장이 광서제에게 알려지면서 광서제가 주도하여 1898년 4월 하순에 약 100일에 거쳐 소위 ‘무술변법’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특히 ‘자신의 개혁이야 말로 공자의 정신을 계승한 것’(공자개제론)이라는 캉유웨이의 주장은 수구파의 공격을 불러왔다. 결국 변법파가 영국, 일본과 연합하는 외교 방침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가 청을 방문해 광서제를 만나자 서태후 측과 수구파는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하고 서태후가 訓政훈정을 재개하여 변법자강운동은 실패하였다.
의화단운동-1899년-1900년 기간 산둥성에서 반기독교 폭동을 계기로 화북 일대에 퍼진 반제국주의 농민 투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의화단운동이라 한다. 중심 세력인 의화단은 백련교 일파로 불리는 종교 비밀결사로서 당시 사회 모순, 기독교 전파, 독일 진출에 반감을 품고 '부청멸양'을 부르짖으면서 무력으로써 배외 운동을 전개했다.1899년 산둥성 서부에서 의화단은 폭동을 일으키고 외국인 특히 기독교도(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를 박해했고 청조에서도 이를 선동해 폭동이 확대하였다.1900년에는 베이징에까지 들어와 관군과 함께 11개국 공사관[주해 2]을 공격했으나, 영국, 러시아, 독일, 미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8개국 연합군에게 격파되었다. 1901년 9월 베이징 의정서의 성립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으나 엄청난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12개 항 조약 내용은 청의 면모를 크게 실추시키면서 식민지화를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조의 개혁-변법자강운동은 서태후와 수구파 탓에 실패했으나 의화단 운동의 참혹한 결과로 국내상으로는 막대한 세금 징수로 민심의 동요와 불만, 국외상으로는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가 증폭하여 청 조정은 내정과 외교 총체가 위기에 처하였다. 특히, 상층도 청조에 불만이어서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위기였다. 1901년 1월 청의 실권자 서태후는 “외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의 단점을 버려 부강을 꾀한다”는 방침하에 고위 관료들에게 국정에 관한 의견을 上申상신하라고 명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청 정부는 생존하려는 ‘新政신정’을 개시했는데 이를 서태후의 존호인 慈禧자희를 따 ‘慈禧新政자희신정’[주해이라고 한다. 직례총독 위안스카이, 양강총독 유곤일, 호광총독 장지동이 추진한 신정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과거제도 폐지와 학당 설립 개혁-정부 주도하에 이뤄진 개혁 중 최요하고 시급한 개혁이 교육이었다. 청조는 국외 유학을 장려하고 전국의 학당(서원)을 신식 학교로 바꾸도록 하여 점차 과거 시험 준비 기관이었던 재래식 학당이 신식 학교로 바뀌어 갔다.그러나 이 교육 개혁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하급수로 학교 수와 학생 수는 늘어갔지만 정작 가르칠 신식 교사는 태부족하여 전체 교사의 반이 신식 교육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구식 교원들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문제로 사립학교든 공립학교든 간판만 바꿔 단 과거 학당이었고 그 설립자나 운영자는 거의 신사층, 즉 향토 지식인으로 이들은 근본으로 과거 제도 폐지를 반대하여 신식 학교의 설립도, 국외 유학도 반대해 왔던 세력이다.이들은 교육 개혁에 따라 과거 학당 존재가 위험해져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학당을 신식 학교로 개조해 교묘하게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므로 외양만 바꾸었지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은 허울 좋은 교육개혁이었을 뿐 신식 학교도 과청조에서 주도한 교육개혁은 여러 가지 한계점이 보였는데 군사제도 개혁에서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제1차와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시작해 청불 전쟁, 청일 전쟁, 의화단 운동 등 전쟁마다 패배를 거듭해 온 청은 신식 군대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군사 개혁에 착수했다. 의화단운동 이후 주력 군대는 무위우군만 남고 나머지는 해산되었다. 의화단운동을 계기로 급부상하고 출세 지향 일로를 달리던 위안스카이가 직례총독이 되어 무위우군을 이끌고 톈진에 주둔하였다.[8] 청조도 기존 군대의 부패와 무능을 알고 1901년 8월에 무과의 과거제를 폐지하고 각 성에 명령하여 북양(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 新建陸軍)과 양강(장지동의 자강군)을 모방해 무비학당(武備學堂)을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기존 군대를 해산시키고 상비군을 새로 편성 훈련하도록 지시하였다.1901년 위안스카이가 주축이 되어 서양식 군대인 ‘신건육군, 약칭 '신군'이 36개 사단으로 재조직되었다. 특히 ‘자희신정’의 결과로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인 위안스카이를 영수로 하는 북양 군벌이 급성장해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1905년에 북양 군벌은 병력 약 7만, 사단 6개 규모로 구성된 북양 신군을 보유하였다. 이중 사단 4개는 즈리 성, 나머지 사단 2개는 만주와 산둥성에 배치됐으며, 군사권 실질 권한자로 급부상한 위안스카이[주해 6]는 교통은행을 설립하고 영국의 지지하에 철도 운수 부문 실권도 장악했다.거 준비라는 과거 기능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입헌군주제 추진-신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청조를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로 국가 부흥을 꾀하자는 입헌 운동도 전개됐다. 특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사태를 계기로 “아시아인도 입헌하면 유럽을 이길 수 있다”는 양계초의 주장이 널리 호응을 얻었다. 실업 진흥 기치하에 민족자본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 발전하기는 했으나 외국 자본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해서 신흥 자본가 계층은 입헌 개혁을 지지했다. 입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퍼져가는 가운데 대세를 관망하던 위안스카이는 1905년에 황족과 귀족을 국외에 파견해 정치를 시찰시키면서 입헌하려는 준비해야 한다고 황실에 상주했다. 서태후의 측근 대신들도 “입헌해야 군권(君權)이 영구히 굳건해진다”고 서태후를 설득했다.푸이가 즉위하니 그가 청 최후 황제인 선통제다. 섭정인 순친왕은 1909년 1월 위안스카이를 해임했다.[주해 7] 선통제가 즉위한 후 입헌파는 국회를 조기에 개설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를 계기로 청조를 타도하려는 혁명파의 입지가 강화하였다.
당시 중국 내 상황-일변 중국 내 경제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청 조정은 1900년에 있었던 의화단운동으로 말미암아 서양 열강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주해 8]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신정’ 실행에도 많은 재원이 필요하여 각종 세금이 새로 생겨나 민중 고통이 상당히 심해졌다. 농민 봉기가 1906년에 199회, 1907년에 188회, 1909년에 112회, 1910년에 266회나 일어날 정도로 만연했고 1911년 이후에는 더욱 급속히 증가했다.청조가 추진한 교육개혁으로 신식 학교가 설립되고 유학생이 대거 파견된 결과로 전통 독서인과 유형이 다른 지식 계층이 탄생했다. 1908년에는 전국에 학교 47,000여 개가 있었고 학생은 약 130만 인, 교원은 약 63,500여 인에 달했다. 이들 새로운 지식 계층은 차츰 혁명 사상과 입헌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특히 일본으로 유학을 간 중국인 유학생들은 급속하게 입헌 사상과 혁명 사상을 수용했다.반응형'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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