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11. 16.

    by. 멀티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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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와 천황(일본어: 昭和天皇, 1901년 4월 29일 ~ 1989년 1월 7일)은 일본의 제124대 천황(재위 : 1926년 12월 25일 ~ 1989년 1월 7일)이다. 본명은 히로히토(일본어: 裕仁)이며, 어릴 적에 쓰이던 군호는 이치노미야(일본어: 迪宮)이다. 또, 쇼와 천황이 사용하던 오시 루시는 어린 대나무를 상징했다. 다이쇼 천황과 구조 공작과의 당주 구조 미치타카의 딸 데 이메일 황후의 맏아들이다. 메이지 천황이 확립한 일세일 원제에 따라 재위 기간 쓴 연호는 쇼와(일본어: 昭和)이다. 히로히토는 1928년 다이쇼 천황에 뒤이어 천황 자리에 올랐다. 당시 아시아 유수의 강대국이던 일본에서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침체가 있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제국주의의 팽창론이 세력을 크게 불려 1930년대 후반에는 결국 천황을 비호하고 정부를 장악한 군부가 중국과 인도차이나 등을 침략하기에 이른다. 이후 일본제국은 미국과 벌인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쇼와 천황은 전범 기소와 황위 박탈은 면했으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군국주의를 철저히 배제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쇼와 천황 및 앞으로의 천황들에게서 정치적 실권은 빼앗기게 된다. 정치적 실권을 잃은 쇼와 천황은 이후 해양생물학 연구에 매진하는 등 개인적인 삶을 살다가 1989년 십이지장암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장남 아키히토가 천황 직위를 후계하였다.

     

    -출생과 성장: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9일, 도쿄의 아오야마 어쏘에서 당시 요시히토 황태자였던 다이쇼 천황과 데 이메일 황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관례를 맡은 이들은 황자에게 군호는 ‘덕을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이치노미야’를, 이름은 중국의 고서인 《상서》(尙書) 에 등장하는 격언 ‘유 내이 만년’(裕乃以民寧)에서 딴 ‘히로히토’(裕仁) 를 붙여주었다. 히로히토의 아래로는 1902년에 태어난 지친 부모님이야 야스히로 친왕, 1905년에 태어난 다카마쓰도 미야 노부 히터 친왕, 1915년에 태어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있었다. 히로히토가 태어나기 전, 메이지 천황과 측근들은 근친혼이 아이의 요절이나 병약한 아이의 출산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족이 아닌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구조 마치 타 카 공작의 넷째 딸인 구조 사다 코를 황태자비로 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시종들을 대동하여 몇 차례 만난 후 1900년 봄에 결혼하였다. 메이지 천황은 요시히토, 황태자비 사다 코의 의견을 물은 끝에 히로히토를 군인이 가르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히로히토를 교육할 후견인이 될 군인은 결혼한 육군·해군 장교여야 했으며 ‘군인 적인 모습’을 히로히토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했다. 메이지 천황은 오야마 이와도 제국 육군 참모총장에게 히로히토를 맡기려 했으나 우두머리만은 이를 사양했다. 이 때문에 메이지 천황은 옛 사쓰마번 출신의 번벌(藩閥)이자 해군 중장과 해 군경을 지낸 사와무라 스미요시 백작에게 히로히토의 양육을 맡기기로 하였다. 사와무라는 유학을 배웠으며, 황태자비 사다 코와는 먼 인척 관계였다. 히로히토를 맡은 사와무라는 히로히토를 이기적인 인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일 줄 알며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기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히로히토는 사와무라가 세상을 떠난 1904년 11월까지 사와무라의 저택에서 지냈으며, 그 후 동생 지친 부모님이야 와 함께 요시히토와 사다 코 아래서 자라게 됐다. 히로히토 형제의 직접적인 양육은 요시히토 황태자의 신임 시종장 기도 다카 마사가 맡았다가 나중에 전담 시종과 궁녀들이 그 일을 맡게 됐다. 히로히토를 돌본 궁녀 중, 일본의 항복 직전 마지막 총리대신을 지낸 스즈키 간타로의 부인이 된 아치 다카는 둘째 지친 부모님이야 와는 달리 히로히토가 조용하고 신중한 아이였다고 평가했다. 1908년 봄부터 히로히토는 도쿄 요 쓰냐에 있는 가쿠슈인의 초등과의 들어갔다. 메이지 천황은 러일 전쟁에서 활약했던 육군 대장 노기 마레스케를 제10대 가쿠슈인 원장으로 임명해 히로히토를 비롯한 황손들의 교육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노기는 엄격한 군대식 교육과 무사도, 유학 사상, 선(禪)을 강조하였으며, 황손들을 엄격하게 대했다. 히로히토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 요시히토 황태자와는 어쏘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했지만 아다리의 말에 따르면 메이지 천황은 히로히토를 비롯한 손자들을 만나는 것을 매우 꺼렸으며 손자들의 생일날에 손자들을 만날 때에도 군복 차림으로 앉아 권위적인 인사치레만 받았다고 한다. 또 노기는 히로히토의 건강을 고려하여, 교사진들에게 체육 교육과 건강관리에 특히 신경을 쓰도록 하였으며, 노기 자신은 히로히토에게 자신이 미래의 제왕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검소, 근면, 인내, 남자다움, 의무에 대한 헌신 등을 강조했다. 네 살부터 여덟 살까지 히로히토는 아우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도쿄의 중심부를 자주 돌았으며, 러일 전쟁의 군사 지도자들이나 메이지 시대의 내각 관료들이 히로히토가 있는 황손 어전을 찾기도 했다. 한편, 1910년에 메이지 천황은 황실 남자들에게 ‘황족이신 위령’을 내려 군사 훈련받고 군무를 맡도록 강제했지만 어린 히로히토에게 주어진 군사 훈련은 승마 훈련과 ‘특별히 뽑힌 학우’ 몇 명과 벌이는 전쟁놀이뿐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히로히토는 궁내 성 장전부(掌典部)의 궁정 귀족으로부터 신토 식 제사 의식을 익혔는데 이는 천황이 신토의 최고 신관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2년 7월 29일, 메이지 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히로히토의 아버지 요시히토가 천황이 되면서 히로히토는 황태자로 책봉됐으며, 육군·해군 소위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노기를 뒤이어 히로히토의 남은 초등과 2년 과정은 러일 전쟁 때 활약한 해군 제독인 도고 헤이하치로와 해군대좌 오가사와라 나가 나리 자작이 가르치게 됐다. 초등과 과정을 마친 히로히토는 어학 문서에서 특별히 선발된 다섯 학우와 함께 군사와 일반교양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도고는  어학 문서의 교장을 맡았고, 오가사와라는 어학 문서의 교사진을 선발하고 감독했다. 오가사와라는 군인과 도쿄 제국대학을 나온 학계의 권위 있는 교수들로 교사진을 꾸렸다. 군사 교육은 노기의 후임으로 가쿠슈인 원장이 된 오사코 나오하루, 해군 대장 사토 뎄어 타로, 독일 제국에 유학을 다녀온 후 시민 노 미야 피로 야스, 육군 소장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와 나라 다케시를 비롯한 2명 등이 맡았다. 이들은 러일 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실시했으며, 히로히토에게 군대에서의 무사도를 강조하고 강력한 대함대를 중심으로 한 전투와 백병전을 중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제왕 수업을 받던 시절에 히로히토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인물로는 스기우라 주고, 시라토리 구라키치, 시미즈 도루가 있었다. 영국 유학파 출신으로 국수주의자였던 스시우라는 히로히토를 가르치면서 일본의 국수주의와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표트르 1세와 빌헬름 2세보다 유능한 측근이 많은 일본의 천황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스시우라는 “서양인들이 황화[주해 5]를 두려워하지만, 우리는 백화를 한탄한다”고 말하면서 통속적 사회진화론에 따라 세계를 백인종과 황인종 간의 대립 중심으로 가르쳤다. 한편 독일 유학파 출신인 시라토리는 중국의 요, 순, 우 신화는 모두 허구라고 비난했으며 역사를 가르치면서 일본을 “아시아의 평화를 확보할 유일한 나라이며, 한국을 침략한 것은 한국 국민들의 복지를 증진하는 데 유익한 것”이라고 미화했다. 마지막으로 시미즈 도루는 히로히토에게 법학 등을 가르치면서 메이지 천황을 ‘완벽한 군주상’으로 포장했다.

     

    -황태자 시절:

    히로히토는 1919년 5월, 만 18세의 나이로 성년식을 치렀다. 1917년에는 히로히토의 비가 될 이를 고르게 됐는데 어학 문서에서 히로히토의 교육을 책임졌던 오가사와라 나가 나리와 궁내 대신 뜨겁노 요시 나오기 여기에 관여하였다. 오가사와라는 히로히토의 신붓감으로 왕녀 세 명의 이름을 데 이메일 황후(다이쇼의 비, 구조 사다 코)에게 올렸고, 데 이메일 황후는 이들 세 명 중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의 딸인 나가노(良子)를 신부로 간택했다. 이 때, 히로히토의 결혼 문제를 두고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전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황실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나가노의 어머니 쪽인 시마즈 씨가 대대로 색각 이상을 앓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파혼을 주장했으며 히로히토를 당분간 해외로 여행을 보내고자 “황태자비 간택 절차를 철저히 밟지 않았다”는 구실로 화젯거리여서 노를 궁내 대신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러면서 야마가타는 새로운 궁내 대신으로 자신의 파벌에 속한 육군 중장 나카무라 유지로 추천했다. 하라 다카시 총리대신은 야마가타를 지지하였는데, 하라는 다이쇼 천황의 지병이 유전적인 요인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으며 이번 일을 계기로 야마가타와 좋은 관계를 맺어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다. 장인이 될 구니노미야는 황후 사다 코와 스기우라 주고를 끌어들여 야마가타의 행보에 반격했다. 결국 스시우라는 겐요샤의 대두였던 도야마 미쓰루에게 접근했다. 도야마는 흑룡 회화 낭인 회 등에 속한 동지들, 오카와 슈네이나 기타 잇기와 같은 대아시아주의자들과 함께 반 야마가타 투쟁에 참여했다. 결국 1921년 2월 초에 야마가타는 혼인에 대한 반대 의견을 철회했다. 2월 10일에는 궁내 성과 내무성이 히로히토의 결혼은 예정대로 거행할 것이며, 궁내 대신 나카무라 유지로 와 차관 이시하라 겐조가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 2월 15일에 하라 내각은 히로히토가 유럽을 다녀올 것이라고 발표했다. 혼인과는 달리 히로히토의 유럽 여행은 스기우라와 도야마 등 우익 세력이 반대했던 것이었다. 히로히토의 혼례 문제를 두고 벌어진 이 일련의 권력 투쟁은 요미우리 신문 등 전국구 언론을 중심으로 “궁중의 어떤 중대한 사건”(宮中某重大事件)으로 은폐됐다. 하지만 이것이 여의찮아 보이자 스시우라는 구니노미야의 인척인 시마즈 씨 출신의 화복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야마가타와 하라가 황실의 장래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의 정당성에 밀려 궁내 여론을 돌리지는 못했다. [19] 그러던 중 오쿠보 도시미치의 차남으로 사쓰마 파의 중심 인사 중 하나였던 마키도 노부아키가 파리에서 평화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자, 스기우라의 제자이자 야하나 제철소의 장관이었던 시라니 다케시가 마키 노를 설득하려 했지만 언질을 받아내지 못했고 야마모토 고았나 효에도 스기우라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한편, 히로히토가 유럽으로 떠날 때의 공식 명목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이 끝나가던 1918년에 일본의 황실을 찾은 코넛과 스타래선 공작 아서 왕자를 답방하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오랫동안 병상에 있는 다이쇼 천황을 통해 국민들이 품은 황실에 대한 나쁜 여론을 히로히토의 해외여행을 통해 무마하는 것에 있었다. 처음에 황실은 히로히토의 안전을 우려하여 반대했으며, 입헌 국민당, 헌정회 등의 의원들, 도야마 미쓰루, 유치다 조사의 등의 극우께 거물들도 반대했다. 이에 원로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데 이메일 황후에게 “베르사유 조약 이후의 유럽의 정세를 (조만간 섭정을 맡을) 황태자가 살피는 것은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려 황후의 마음을 돌렸고 반대 여론은 차차 수그러들었다. [22] 해외 순방 일정은 다이쇼 천황의 유고에 대비해 최대한 서둘러 실행해야 했다. 그 때문에 정부와 궁내 관료들은 히로히토가 찾을 나라로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바티칸 교황청과 이탈리아로 한정했다. 미국의 워런 하데 정부도 히로히토의 방문에 관심을 가졌으나 히로히토와 미국 기자들 사이의 소통 문제를 우려한 워싱턴 D.C.의 주미 일본 대사 시데하라 기주로의 진언으로 미국은 방문 국가에서 제외됐다. 1921년 3월 3일에 히로히토와 간인 노 미야 고토 히터 친왕, 진다 스테이크 백작, 나라 다케지 육군 중장과 수행원 34명이 도쿄역을 출발하여 해외 순방길에 올랐다. 이들은 요코하마에서 가토기 호를 타고 5월 7일에 영국에 도착했으며, 그 후로 영국에서 24일간, 프랑스에서 26일간,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각각 5일간, 이탈리아에서 8일간 머물렀다. 히로히토는 순방 중에 영국 왕세자 웨일스 공과 국왕 조지 5세, 벨기에 왕 알베르 1세,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교황 베네딕토 15세 등을 만났으며 7월 18일에 유럽을 떠나 9월 2일 지바현 다테야마를 거쳐 다음날인 3일에 요코하마로 돌아왔다.

     

    -천왕의 자리에 오르다:

    다이쇼 천황은 1926년 12월 25일 새벽, 가나가와현의 하야하지 마 별장에서 사망하였다. 히로히토는 부황 사망 후 제124대 천황이 되었으며 메이지 시대부터 내려오는 관례대로 열린 추밀원은 회의에서 새로운 천황을 위한 연호를 정하게 됐다. 앞서 다이쇼 천황이 사망하기 몇 주 전 마이니치 신문은 황가에서 흘러들어온 풍문을 따라 새 천황 히로히토가 밝은 문화의 창달을 뜻하는 ‘고분’(廣文) 이라는 연호를 쓰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으나 천황의 새로운 연호를 ‘쇼와’(昭和) 라고 12월 26일에 대외에 공식 발표하였다. 쇼 오(소화)(소화)란 ‘밝은 조화’, ‘찬란한 평화’, ‘세상이 태평하고 백성과 임금이 하나 됨’을 의미하는 한자어이다. 새 천황은 같은 날, 육·해군 장병과 와카 쓰기 총리, 황실 종친 간인 노 미야, 사이 온 지 공작을 불러놓고 모든 국민에 대하여 칙어를 내어 자신의 즉위를 선포함과 동시에 칙어를 발표하여 후임 총리 천거는 마지막 원로 사이 온 자기에게 맡기며, 군부의 특권을 인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28년 11월 10일에는 교토로 행차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히로히토는 이제 정치 세계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게 됐으며, 일명 ‘측근’이라 불리는 7명의 인사들이 히로히토를 옆에서 도왔다. 나 대신 마키도 노부아키 스즈키 간타로 나라 다케지 야하지, 세키야 데이 사부로 오카베 나가카게 자작 등이 바로 그들이다.한편, 천황의 내각총리대신 임명권은 사이온지가 대행했는데 사이온지는 궁내관 선임에도 커다란 발언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1927년 이후에는 궁내의 측근들이 먼저 새 총리 선정을 협의한 뒤 교토나 오다와라, 오키쓰의 별장에서 지내던 사이온지에게 사람을 보내 재가를 얻었다.하지만 정치적으로 새로이 두각을 드러내던 기도 고이치 후작,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 하라다 구마오 남작 등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가세했다.사이온지와 마키노는 근대 정당의 역할을 무시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지만,마키노와 궁중 측근들이 곤란한 정치 문제는 천황이 관여해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반면 사이온지는 천황이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반대했으며, 마키노가 극우 정치인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염려했다.사이온지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 궁중 측근들은 영국, 미국 등의 대사관부터 일선 군부대에서까지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를 히로히토에게 전달하는 구실을 맡았으며, 명목 상의 입헌군주였던 히로히토의 실질적인 권력 행사를 도왔다.하지만 정치적으로 새로이 두각을 드러내던 기도 고이치 후작,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 하라다 구마오 남작 등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가세했다.

     

    "일본 천왕의 삶에 대해
    포스팅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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